조선후기

털모자를 수입하는 조선

afsefe 2022. 12. 28. 19:39

박지원은 양털이 없어 털모자를 못만든다고 하는데 방한용 모자는 목화 솜으로도 만들수 있다. 이정도 생각도 못하고 틀에 박힌 사고밖에 못하니 우스울 뿐이다. 가지고 간 은화의 절반을 털모자 수입하는데 썼다. 나머지 절반의 은화는 바늘 같은 생필품을 수입한다. 조선은 상공업이 발달못해 바늘같은 생필품도 수입해다 썼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일신수필(馹汛隨筆)

7월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백 62리다.

22일 무술(戊戌)

우리나라에서 쓰는 털모자는 모두 이곳에서 만드는 것이다. 그 공장은 모두 셋이 있는데, 한 집이 적어도 30~40칸은 되며 거기서 일하는 공인은 모두 백 명이 넘는다. 의주 상인들이 수없이 많이 와서 모자를 예약해 놓았다가 돌아갈 때 싣고 간다. 모자 만드는 법은 매우 쉽다. 양털만 있다면 나도 만들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양을 치지 않으므로 인민이 1년 내내 고기 맛을 모르고, 전국의 남녀 수는 수백 만이 넘는데 사람마다 털모자 하나씩을 써야만 겨울을 날 수 있게 된다. 해마다 동지(冬至)ㆍ황력(黃曆)ㆍ재자(賫資) 등의 사행에 가지고 가는 은이 줄잡아도 10만 냥은 될 것인즉, 10년을 계산하면 무려 백만 냥이다.

모자는 사람마다 삼동만 쓰다가 봄이 되어서 해지면 버리고 말 뿐인즉,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으로써 한겨울 쓰면 내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어 내는 한도 있는 은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갖다 버리니,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일인가.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고 그 손놀림이 바람처럼 날쌔다. 우리나라에서 갖고 온 은화(銀貨)가 이곳에서 반은 사라지는 터이므로 공장 주인이 각기 단골 손님을 정하여 의주(義州) 장사치가 오면 반드시 크게 주식(酒食)을 베풀어 대접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