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승려 파스파의 대우

afsefe 2023. 3. 9. 14:38

고려시대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수입한건 잘알려져 있다. 밑에 자료의 내용은 원나라 황제 인종이 천하에 승려 파스파 사당을 세운다고 하고있다. 

 

※ 치평요람 (治平要覽) 조선 세종 27년(1445)에 왕명에 따라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책. 

치평요람 제144권 / 원(元)
[인종〔仁宗〕]

고려(高麗) 심왕(瀋王)이 원(元)나라에 갔다. 고려 임금 왕도(王燾)가 금교역(金郊驛)으로 나가 전별하면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니, 심왕이 눈물을 흘리며 국사(國事)를 임금과 재추(宰樞)들에게 부탁하였다. 원 인종(元仁宗)이 명하여 심왕으로 하여금 연경(燕京)에 머물러 있도록 하니, 심왕이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놓고, 대유(大儒) 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등을 초청하여 교유(交遊)하면서 학문을 고증하고 연구하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겼다. 이때 선비족(鮮卑族)의 승려가 인종에게 건의하기를, “제사(帝師) 팔사파(八思巴)가 몽고의 글자를 창제하여 국가에 이롭게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천하에 그의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공자(孔子)와 대등하게 대우하소서.”라고 하니, 인종이 조서를 내려서 공경(公卿)과 기로(耆老)들로 하여금 모여서 그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국공(國公) 양안보(楊安普)가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니, 임금이 양안보에게 이르기를, “제사가 몽고의 글자를 창제하여 나라에 공로가 있다면, 스스로 옛 전장(典章)에 따라 제사를 지낼 것이지, 어찌 반드시 공씨(孔氏)에게 견주어야 하겠습니까? 공씨는 백왕(百王)의 스승입니다. 온 천하가 그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덕이 있기 때문이지,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후세에 이론(異論)이 있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이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옳게 여겼다.
※ 이상은 《고려사(高麗史)》 34권 〈충숙왕세가(忠肅王世家)〉 원년조의 기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