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조광조의 조상 조온
조광조는 사림파의 영수(領袖)다. 영수는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사학계에서는 사림파가 조선왕조를 반대하고 낙향한 인물들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선조 양절공 조온은 전혀 그런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조온은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이고, 조온의 아버지 양렬공은 이자춘의 딸과 결혼하여 조선왕조와 친족으로 이어져 있다. 그외에도 사림세력이 화를 당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인물 90여명중 70퍼센트 정도가 한양 거주자 였다. 더군다나 세조의 찬탈에 협력한 사람들이 공신책봉을 받았는데 이때당시 훈구파들은 사장학자들이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곧 문학 이냐 도학 이냐의 싸움이었다. 역사 지식이 짧은 사람들이 이걸 이해 못하는 이유는 고려시대를 이해 못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는 사장학과 불교의 나라였다. 사림 세력들이 조선의 개국 공신들이고, 세조때의 공신들인 훈구세력들은 고려시대의 잔재들이다. 훈구파의 유명한 유자광 도 보면 시와 문장을 즐겼던 사장학자다.
문맥들을 편집해서 올린것이니 완전판을 읽고싶으면 직접 찾으면 된다.
☆계실繼室 - 다시 얻은 처(妻). 계처(繼妻).
※국조인물고 - 조온[趙溫]
공의 휘(諱)는 온(溫)이요 성(姓)은 조씨(趙氏)로 그 선계(先系)는 한양(漢陽) 사람이다. 양렬공의 계실(繼室)은 환조 대왕(桓祖大王)의 딸이니, 양렬공은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매서(妹壻, 매제(妹弟)를 말함)인데, 고려 말에 국사(國事)가 다른 성씨(姓氏, 조선 태조를 가리킴)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서 곧 양양(襄陽)에서 노년을 보냄으로써 신하의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마쳤으므로, 양양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그를 제사하였다.
공은 양렬공의 맏아들인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을 섬기어 개국 공신(開國功臣)ㆍ정사 공신(定社功臣)ㆍ좌명 공신(佐命功臣)의 세 공신에 녹훈(錄勳)되고 한천 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양절공(良節公)이다.
공의 4세손(世孫)인 정암 선생(靜菴先生)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에 이르러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하여 우리나라의 유종(儒宗)이 되고 부자(夫子, 공자(孔子)를 말함)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니, 그 또한 공이 덕(德)을 쌓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조온 [趙溫]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