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백운거사 이규보의 몽비부

afsefe 2023. 4. 8. 15:30

동국이상국전집 제1권 / 고부(古賦) 6수(首)

몽비부(夢悲賦)

저 예쁘게 생긴 왕손(王孫 귀공자(貴公子)의 칭호)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지. 뛰어난 풍류(風流)도 사랑스럽고 윤택한 얼굴도 옥과 같은데, 나갈 땐 높은 수레, 들어올 땐 화려한 집, 여의주(如意珠)를 들어 산호(珊瑚)를 부수고도 마음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네. 뒷방에 고운 여자 비취잠(翡翠簪) 꽂고 가죽 신 끌면서 나와 찬란한 차림으로 번갈아가면서 모실 때 쨍그랑 울리는 패옥(佩玉) 서로 부딪친다.

눈에 드는 아리따운 태도와 귀에 익은 거문고와 피리 소리에 겨울철 찬 바람에도 추운 줄 모르고 여름철 찌는 듯한 날씨에도 더운 줄 모르니 이 세상 인생살이에 온갖 곤궁과 걱정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랴? 봄 날씨가 이미 따뜻해지면 꽃다운 향기에 마음이 감동되어 여러 손님과 친구를 좋은 집에 초청하면 옥으로 만든 잠(簪)을 꽂고 진주로 만든 신을 끌면서, 금으로 만든 술잔으로 좋은 술 부어 마시고 모두들 정신이 없도록 취한다오.

해가 저물면 녹계(綠桂 향(香)의 일종으로 불을 밝히는 데 씀)를 태우면서 흩어질 줄 모르고 끝없이 놀고 있네. 갑자기 봄밤이 늦어지자 넘어가는 달빛이 창을 정답게 엿보는데 문득 몸이 나른하고 정신이 피곤하여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네. 훈훈한 박산 화로는 향냄새 내뿜는데 휘장이 드리워진 채 비단 이불 덮고 있다. 아침해가 벌써 떠올랐어도 우레처럼 코를 골면서 잠만 자다가 갑자기 또 잠결에 꿈을 꾼다.

저 허허벌판 무인지경(無人之境)에 날아들어가 사방을 돌아보아도 언덕도 마을도 보이지 않는데 깊은 강은 물결이 절로 일어나고, 관목(灌木) 떨기가 서로 우거졌는데 풀빛은 모두 시들어지고 높은 바위는 금방 떨어질 듯하다. 침침한 해가 지려 하는데 깜깜한 연기는 자욱하고 원숭이가 마주 울며 서로를 슬퍼하며, 뭇새도 지저귐을 그칠 줄 모른다. 쓸쓸한 마음에 집 생각이 나 빨리 돌아가려고 해도 앞길이 어딘지 모르겠다.

생각하노니 빈어(嬪御 잉첩(媵妾))들 모두 어디에 있는지. 푸른 소매 가리고 눈물만 닦으면서, 높은 언덕 올라가 멀리 바라보아도 온갖 봉우리만 이리저리 얽혀져 있다. 더부룩한 숲 헤치면서 험악한 길로 올라가니 맹수(猛獸)가 뛰어나와 덮칠까 무섭구나. 그만 되돌아서서 언덕을 향해 가니 옛무덤만 다닥다닥 연달아 있는데, 위에는 뛰는 여우와 숨은 토끼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날뛴다.

넘어진 비석(碑石)을 내려다보니, 옛날에 잘살던 귀공자(貴公子)들이다. 노래하고 춤추던 집들 누구에게 물려주고 이 산기슭의 한 무덤이 되었을까? 부귀(富貴)도 뜬구름과 같아 옥 같던 얼굴 찾을 곳이 없도다. 이 사람 슬퍼하면서 방황하노라니 눈물이 절로 나고 코끝이 시큰해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돌아갈 곳이 없자, 배고픔과 목마름이 번갈아 찾아오는구나.

갑자기 기지개 켜다가 꿈을 깨니 밝은 창문이 눈앞에 환히 보인다. 의자에 제대로 누워 있는데 어떻게 한바탕 먼 놀이를 했었을까? 잠깐 동안 꿈을 꾸어 영욕(榮辱)이 서로 교차됨을 깨달았네. 왕손(王孫)이여! 이것을 꼭 마음에 새겨서 빈천(貧賤)하여 떠다니는 사람들의 시름을 길이길이 잊지 마시오.

[주-D001] 여의주(如意珠)를……부수고도 : 진(晉) 나라 부호(富豪) 석숭(石崇)이 왕개(王愷)와 서로 호화를 다투어 자랑하는데, 왕개는 무제(武帝)의 외삼촌이므로 무제가 왕개를 자주 도와 주었다. 한번은 무제가 왕개에게 한 자가 넘는 산호수를 내려주었다. 왕개가 석숭에게 자랑하였더니 석숭은 여의주로 그 산호를 때려 부쉈다. 왕개가 깜짝 놀라니 석숭이 자기 집에 있는 석 자가 넘는 수십 개의 산호수를 가져다 보여 왕개를 더욱 놀라게 하였다. 《晉書 石崇傳》

[주-D002] 옥으로……만든 신 : 구슬로 장식한 신을 말하는데, 춘신군(春申君)의 객(客)이 3천여 명인데, 그 상객(上客)은 다 구슬신을 신었다 한다. 《史記 春申君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