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기

동학교주 최제우

afsefe 2023. 5. 30. 11:55

동학장군 전봉준 https://iece12345.tistory.com/301

 

고부백성의 소란은 동학농민 운동을 뜻한다. 동학(東學)은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서, 동양종교인 도교 , 유교 , 불교 세개를 합친거다. 직접적인 이름은 천도교(天道敎)다. 천도교는 지금도 있다. 조선 정부에서는 동학 세력이 커지자 최제우를 잡아들여서 처형했다. 애초에 조선 또한 정신나간 종교쟁이들이 건국한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만큼 나라에 위협이 되는거다.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2월 15일 임술 4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의정부에서 민란의 원인이 된 충청 병사 이정규의 처벌과 고부 민란을 처리할 것 등을 아뢰다
고부(古阜) 백성들의 소란은 곧 이른바 동학당란(東學黨亂)의 시초였다. 원래 경주(慶州) 견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 사람인 최제우(崔濟愚)는 어릴 때 이름은 복술(福述)이고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이다. 순조(純祖) 갑신년(1824)에 태어나서 목면(木棉)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경주와 울산(蔚山) 사이를 왕래하였다. 하루는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고 상제(上帝)의 신탁(神託)을 받았다고 하고는, 주문(呪文)을 만들어 퍼뜨리기를, "나의 교(敎)를 믿는 사람은 재난을 면할 수 있고 오래 살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천도교(天道敎)가 포덕(布德)을 한 원년(元年)이다. 이때 천주교(天主敎)가 점점 성해지자 포덕문(布德文)을 지었는데, "서교(西敎)는 우리의 옛 풍속과 오랜 습관을 파괴하니, 만일 그것이 퍼지도록 내버려둔다면 장차 나라를 잃고 백성이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빨리 막아야 하겠는데 유교(儒敎)는 힘이 약하니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교이다." 하고는, 그 교를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서학(西學)에 상대하여 이른 말이다. 고종(高宗) 광무(光武) 9년에 교(敎)의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라고 고쳤다. 그 교의(敎義)는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 세 교의 내용을 대략 취하여 부연하여 꾸미고 또 상제가 우주(宇宙)를 주관한다는 기독교(基督敎)의 주장을 취하여 상제가 인간의 화(禍)와 복(福)을 실제로 맡고 있다고 하여, 시골 백성들이 많이 믿었다. 그 신도들은 밤이면 반드시 맑은 물을 떠놓고 보국 안민(輔國安民)을 빌었으며 밥을 지을 때에는 쌀 한 숟가락씩을 덜어 내어 ‘성미(誠米)’라고 하면서 교주(敎主)에게 바쳤다. 몇 해 사이에 신도가 점점 많아지니 정부에서는 그것이 이단이고 사설(邪說)이라고 해서 금지하였다. 옛날 철종(哲宗) 계해년(1863)에 최제우를 체포하여 대구부(大邱府)의 옥에 가두었다가 이듬해 고종 갑자년(1864)에 저자에서 참수(斬首)하였다. 그의 제자인 최시형(崔時亨)이 그 뒤를 이어 제2세 교주가 되어 포교(布敎)하는 데 힘쓰면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다. 그 후 그의 제자인 손병희(孫秉熙)가 최시형의 뒤를 이어 제3세 교주가 되었다. 이때에 주군(州郡)에서 동학을 금지한다고 하면서 때때로 그들을 박해하고 못살게 구니 교도(敎徒)들이 분노하여 모여 상소를 올려 교조(敎祖)가 억울하게 죽은 일을 하소연하고 탐오하는 관리들의 포학상을 호소하였다. 이에 그들은 더욱 굳게 단합되고 신도가 더욱 많아져서 곳곳에서 소동을 피웠다. 정부에서는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용직(李容直)에게 타일러 해산시키도록 명령하였으며, 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 선무사(兩湖宣撫使)로 임명하여 충북(忠北) 보은군(報恩郡)에 달려가서 그 신도를 모아놓고 선유(宣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고종(高宗) 갑오년(1894) 2월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古阜) 백성들이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오와 횡포에 견딜 수 없어 모여서 소란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이용태는 그 무리가 많은 것을 꺼려서 병을 핑계대고 머뭇거리면서 도리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니 민심이 더욱 격화되었다. 고부 사람 전봉준(全琫準)이 떨쳐 일어나 동학당(東學黨)에 들어가니 각지(各地)의 폭도(暴徒)들이 소문만 듣고도 호응하였으며, 김해(金海) 백성들은 부사(府使) 조준구(趙駿九)를 내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