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6일 임인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사헌부에서 당상관의 선정·감사의 천거·관리의 제수·승정원의 임무 등에 대해 상소하다
1. 사적(史籍)의 저장을 널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전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짓고 말하기를, ‘명산(名山)에 간직하고 부본(副本)-복사본-은 서울에 둔다. ’고 하였사옵니다. 우리 동방(東方)은 단군 조선(檀君朝鮮)이 당요(唐堯) 때에 시작하였고, 기자(箕子) 조선은 주 무왕(周武王) 때에 봉하였사오니, 군신 상하(君臣上下)와 예악 문물(禮樂文物)을 유지하여 서로 전한 것이 오래였사옵니다. 그러하오나 문적(文籍)을 전함이 대개 적고 고려의 사적(史籍)도 잃은 것이 또한 많사오니, 이는 반드시 널리 간직하지 아니하여 병화(兵火)를 만난 까닭이오니 진실로 한탄할 만하옵니다. 또 지금 사고(史庫)는 충주(忠州)에만 있사온데 여염(閭閻)과 섞이어 있사오매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비옵건대, 조종(祖宗)의 실록과 전조(前朝)의 사적(史籍) 및 경서(經書)·제자서(諸子書)·경제 조장서(經濟條章書) 몇 본(本)을 만들어서 각도 명산에 나누어 간직하고, 해마다 돌려가면서 포쇄(曝曬) 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다만 사적(史籍)을 나누어 간직하는 계책만 좇아서 춘추관에 내려서 마감하여 아뢰기를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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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그 천문시계 기사쓴 기자가 이번엔 세종이 실록사고를 확충해서 임진왜란때 실록을 지켜냈다. 라고 말했다. 근데 이게 또 골때린 것이 그 기자놈이 원문의 일부분을 숨겼다는것이다. 원래 신하들이 세종에게 각도명산에 나누어 보관하라고 했다. 근데 세종은 그저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2곳에 새롭게 사고를 설치했을 뿐이다. 산에다 보관했던건 임진왜란 당하고 간신히 지켜낸 전라도 전주사고를 바탕으로 다시 복사한후 각도명산에 보관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산에다 보관하라고 신하들이 말한걸 어렵다는 이유로 세종은 말을 안들었다는게 된다. 처음부터 신하들 말을 듣고 산에다 보관했으면 임진왜란때 그고생도 안했을게 아닌가, 신하들의 좋은 아이디어를 세종놈이 똥칠을 해서 임진왜란때 그 고생을 한거다. 그 기자놈은 세종 찬양할려고 쓴것이 오히려 세종놈이 멍청한 놈이란것만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