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조선의 활과 화살

afsefe 2023. 9. 26. 14:01

활의 민족 https://iece12345.tistory.com/380

 

요즘 보면 조선은 활의 민족이라고 지들끼리 자화 자찬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들이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 처럼 활을 이용해 제국을 세운 적이있나, 아니면 다른 나라 사서에 조선민족은 활을 잘쏘더라는 기록이라도 있단 말인가, 그저 지금 올림픽에서 메달을 많이 따는거 가주고 과거랑 연결 지은것 뿐이다. 과거 조선시대 활을 보면 내구력이 형편 없었다. 조선인들은 겁이 많아서 활쏘기만 익혔지만 조선 후기에서는 활은 버려지고 조총만 연마 했다. 지금 양궁 잘하는거랑은 상관도 없는것이 한국 양궁은 처음엔 엄청 못하다가 10년후에나 잘했다. 

 

★[주-D001] 힘줄 : 소의 힘줄이다. 활 만드는 재료로 쓰인다.

※목민심서 정약용

목민심서 병전(兵典) 6조 / 제4조 권무(勸武)

우리나라 풍속은 온순하고 근신하여 무예를 즐기지 않고 익히는 것은 오직 활쏘기뿐인데, 요즈음은 이것마저 익히지 않으니 무예를 권장하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궁시(弓矢)와 간과(干戈)-방패와 창-는 모두 옛날부터 내려오는 무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풍속은 간과는 무슨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오직 궁시만을 무예로 여기었다. 그런데 활을 만들 때에는 힘줄은 얇은데 아교만 두텁게 칠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강하나 나중에는 약하며, 겨울에는 강하나 여름에는 약하며, 갠 날에는 강하나 비 오는 날에는 약하다. 활고자〔活彄字〕가 항상 벗겨지고 양쪽 끝이 항상 어그러져서 한 번 쏘고는 한 번 불에 쬐어 말려야 하고, 한 번 당기고는 한 번 도지개〔檠〕에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시위를 매는 데 힘이 들고 뿔이 부러지는 데 애를 먹으니 이런 활을 활이라 할 수 없다. 화살을 만들 때에는 대의 껍질을 벗기고 불에 지졌기 때문에 비와 습기에 견딜 수가 없고, 살 끝에 쇠촉〔鏃〕이 없으니 오직 내기하는 데에나 쓰일 뿐이다. 쇠촉이라는 것도 또한 날카로운 날이 없으니 그것은 오직 사람을 상할까 염려한 것으로서 어떤 물건도 제대로 뚫을 수 없다. 국내에 있는 화살을 통틀어 보아도 모두 이러한 것뿐이다. 관가 창고에 간직된 활촉에 혹 날카롭게 날이 선 것이 있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도 안 되니, 만일 난리가 있게 되면 모두가 맨주먹이요 잡고 나설 것이 없다.

그런데 또 백여 년 동안에 무과(武科)의 폐단이 날로 극심해져서 드디어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한 명도 활을 잡고 나서는 자가 없게 하여, 오늘에와서는 아주 없어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식년(式年)마다 향시(鄕試)[시험]의 액수가 25명인데, - 호남(湖南)ㆍ호서(湖西)를 말한다. 영남(嶺南)은 30명이다. - 좌우로 나누면 12명이다. 그 액수가 이와 같이 적은데도 여기에 응시하는 무사는 많아야 5~6명에 불과하니 방(榜)을 충당할 수가 없다. 그 5~6명도 시읍(試邑)의 군교(軍校)를 강제로 모아다가 헛이름으로 서열을 만들어 그 수를 충당한 것이다. - 대개 과장(科場)[과거 보는곳]은 모든 고을에 돌아가면서 설치하였기 때문에 본년(本年)에 설치한 고을을 시읍(試邑)이라 하였다. - 폐단이 이에 이르고 보면 또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수령이 비록 무예를 권장하고자 하나 어떻게 권장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