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손비서 저택
-祕書 [ 비서 ] 요직(要職)에 있는 사람에 직속하여 그의 기밀(機密) 사무(事務) 따위를 맡아보는 직위
※동국이상국전집 제24권 / 기(記)
손 비서(孫祕書)의 냉천정기(冷泉亭記)
운대 아감(芸臺亞監) 비서성 소감(祕書省少監) 손군(孫君)이 성북(城北)의 어느 마을에 새 집을 지었다. 큰 바위가 있어서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며, 형상은 쇠를 깎아세운 듯이 험준하여 청사(廳事) 북쪽에서부터 동쪽 구석까지 창창하게 둘러 있다. 그 아래에 차가운 샘이 철철 흘러내려 고여서 깊은 웅덩이를 이루었는데 그 맑고 깨끗함이 실로 아낄 만하다.
청사 동쪽에 붙여서 작은 정자를 걸쳐 지었는데 10여 명의 사람이 앉을 수 있다. 맑고 깨끗함이 산재(山齋)와 같으니, 이것은 편안하게 노닐고 한가롭게 지내기 위한 곳이다.
내가 귀인(貴人)의 사는 곳을 많이 보았는데, 그들이 정원을 꾸미는 데는 반드시 굴곡이 많고 우묵하게 패고 혹난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기이하게 생긴 돌들을 가져다가, 여러 개를 쌓아서 산을 만들고 형산(衡山)과 곽산(霍山)의 기이한 모습을 본뜬 것이 진실로 기묘하다.
그러나 그것은 조물주가 일찍이 개벽하여 놓은 높고 깊숙하고 기이하게 빼어난 천연의 형상만은 못하다. 저들도 또한 거짓이 진실만 못한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귀의 힘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은 기이한 꽃, 이상한 나무, 진귀한 새, 기이한 짐승 같은 것뿐이요, 암석의 높고 크며 위엄찬 것 같은 것은 권력으로는 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억지로 가져오려고 하면 마땅히 큰 끌과 잘 드는 칼을 사용하여 조각조각 자르고 한장 한장 쪼개어 수레에 싣고 말로 끌어온 뒤라야 될 것이다. 구차히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다만 깨어진 돌과 흩어진 자갈일 뿐이다. 설사 쌓아서 높게 한들 앞에서 말한 기괴한 돌을 여러 층 쌓아 산을 만든 것과 다름이 없다. 어찌 다시 높고 그윽하며 기이하게 빼어난 천연 그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제 손군의 집은 그윽한 벽지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서울 안 만인이 살고 있는 사이에 있다. 그런데도 거대한 바위의 기이하고 아름다움이 이와 같으니, 손군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손군의 높은 회포와 뛰어난 생각이 실로 진세(塵世)의 밖에 초월하여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공명(功名)에 얽매인 바 되었으나, 마음은 언제나 푸른 산과 흰 구름에 있는 까닭에 하늘이 이것을 선사하여 위로함이라 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손군을 우러러보는 명망도 또한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내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북쪽에 서 있는 바위는 진실로 알맞아서 가감할 필요가 없지만, 동쪽에 있는 것은 너무 가까이 다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심정을 퍽 답답하게 하니 떼어서 3~4척 물린다면 매우 좋겠다.”
하였더니, 주인도 또한 내 말대로 그렇게 여겼다. 그리고는 그 헌(軒)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명명(命名)을 청하기에 내가 ‘냉천(冷泉)’이라 이름을 붙였더니, 어떤 손이 말하기를,
“이 정자가 명승(名勝)이 된 것은 다 이 바위 때문인데, 도리어 한 잔쯤 되는 작은 샘을 가지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 같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바위는 비록 기이하지만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바가 적으며, 샘은 비록 얕더라도 능히 차가운 물이 젖과 같이 사람을 윤택하게 해줌이 원만하지 않은가? 이제 내가 그대와 더불어 차를 끓여 마시고 술을 걸러 잔질하는 것도 또한 샘의 베푸는 바가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샘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니, 손이 부드러운 낯빛으로 크게 웃었다.
손군이 또 나에게 기(記)를 지으라고 청하였다. 아, 나와 나의 붓은 다 늙었다. 그러나 주인의 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본 바를 대충 적는다. 모월 모일에 보문각 대제전고(寶文閣待制典誥) 이모(李某)는 기(記)를 쓰고 뒤에 다시 40자(字)를 적는다.
발바닥 부르틀 정도로 기이한 봉우리 찾으면 / 累繭覓奇峯
어느 곳에서 서로 만나지 않으랴 / 何處不相遇
힘으로 지고 오지 못해 / 力未負而來
돌아와 한갓 생각만 할 뿐 / 及廻空眷顧
부럽도다 그대 이 바위를 가져 / 羨君得茲巖
향로봉 향해 거주한 듯함이 / 擬向香爐住
하필 천태산을 사모하랴 / 何必思天台
멀리 백세조를 배우리라 / 遠學百世祖
[주-D001] 천태산(天台山)을……배우리라 : 송(宋) 나라 때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천태산에 들어가 약을 캐다가 신선을 만나 10세(世) 만에 고향에 돌아온 고사가 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