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뉴스기사로 보는 위안부 사례들

afsefe 2022. 12. 23. 21:20

그당시 여성인권에 대해 알수있는 글이다.

 

정대협이 벌이는 불순한 위안부 놀음, 중단시켜야  뉴스타운  2015.05.24. 

1) 문필기 : 정대협이 매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인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평양-개성-서울을 거쳐 고향으로 갔지만, 이내 고향을 떠나 진주-목포-광주-전주를 떠돌며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1925년, 경남 진양군에서 2남 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 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밥을 해서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 나섰다. 18세 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이야기를 포함해 아래의 모든 이야기들은 정대협이 엮은 '증언집'에 수록돼 있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안부 놀음은 간첩의 처이자 정대협의 상임대표인 윤미향이 꾸려가고 있다. 문제는 이 여인에 있는 게 아니라 정대협에 있다.

 

2) 이상옥 :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 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끼 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 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케이스 였다.

 

3) 이득남 :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되는 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김은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 세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버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 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공장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 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 이 위안부는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