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이끌고 선봉에서 싸운 충혜왕
조선왕 중에 군대를 이끌고 싸운 왕이 었었다면 인기좀 있었을거다.
조적의 난
목은집 [牧隱集] 고려 말·조선 초의 학자·정치가 이색의 시문집
목은집 목은문고
비명(碑銘)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 강경공(洪康敬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기묘년(1339, 충숙왕 복위 8) 3월에 충숙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공이 유명(遺命)에 따라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를 맡았다. 8월에 정승(政丞) 조적(曺頔)이 은밀히 심왕(瀋王)을 편들면서 장차 충혜왕(忠惠王)을 폐출시킬 목적으로, 임금 곁의 소인들을 주벌(誅罰)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는 백관을 거느리고 영안궁(永安宮)을 포위하였는데, 영안궁은 바로 충숙왕의 공주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조적이 일단 백관을 위협하여 꼼짝 못하게 했으면서도 오직 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온갖 계책으로 공의 마음을 동요시키려 하면서 자기의 계략을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더 심하게 잘못을 범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설령 형이 무도하다 할지라도 엄연히 아우가 있는데, 심왕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그의 제안을 더욱 굳게 거절하였다. 그리고 조적이 백관을 협박하여 왕의 죄를 거론하면서 소(疏)를 올리려고 했을 때에도, 공이 끝까지 이를 저지하면서 사자(使者)가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충혜왕은 날쌔고 용맹스러운 데다 말 타고 활쏘기를 잘하였다. 그리하여 정예 군사 10여 인을 이끌고 갑자기 쑥 튀어나와 포위망을 무너뜨린 뒤에 한길을 치달리면서 “역적은 조적일 뿐이요 나머지 사람들은 협박을 당했다는 것을 내가 모두 알고 있으니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크게 소리쳤으며, 조적을 죽이고 나서는 또 소리치기를 “노적(老賊)이 죄값을 받고 죽었으니 다른 사람들은 안심하라.”고 하였다. 충혜왕이 비록 포위되기는 하였지만, 공이 절의(節義)를 고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공이 조적의 음모를 저지시킨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공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했다.
※ 군대를 이끌어 본적없는 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