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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명성이 높았던 공민왕의 글씨

by afsefe 2023. 4. 7.

공민왕은 뛰어난 화가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권근의 시문집

양촌선생문집 제23권 / 찬류(讚類)

이씨(李氏) 이름의 어찰(御札)에 대한 찬 병서(幷序)

내가 서원(西原) 이공(李公)과 함께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을 때, 공은 임금을 호위하는 임무에 있었고 나는 문학의 일을 보았다. 문무(文武)의 길은 달랐으나 아침저녁으로 서로 좌우에 함께 있었으므로 정의가 형제와 같았는데, 하물며 나는 한씨(韓氏)의 인척임에랴. 그 정의가 더욱 두터웠다. 당시 그의 아버지 의곡 선생(義谷先生)이 아직 건강하였는데, 임금은 그가 늙은 학자이며 오랜 덕망이 있다 하여 특별히 예모(禮貌)를 더해 대우하고 친히 ‘의곡청경(義谷淸卿)’이라는 큰 글씨 넉 자를 써서 내렸으며, 목은 상국(牧隱相國)이 이에 대해 찬을 지었다. 그리고 공에게는 ‘승도(承渡)’ 두 글자를 써서 내리니, 이는 그의 이름이다. 도(渡)는, 본래 도(度) 자였는데 배[舟楫]라는 뜻을 붙여 이렇게 고쳐 썼으니, 그 바람이 적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승하하고 공도 이어 세상을 떠났으니, 아, 애석하도다. 아들 좌랑(佐郞) 중만(仲蔓)이 글씨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공민왕의 친필을 받았는데, 나의 할아버지에게는 존경하였기 때문에 자를 써 주었고, 아버지에게는 사랑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써 준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목은의 찬을 얻었으나, 아버지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찬을 쓴 분이 없으니, 후세에 누가 그것이 임금의 글씨라는 것을 알겠습니까. 선생은 나의 아버지와 함께 교유(交遊)하였으므로 감히 청합니다.”

하였다. 공민왕의 필법이 뛰어남과 이씨의 세덕(世德)이 훌륭함은, 목은이 모두 다 말하였으므로 내가 감히 덧붙이지 아니하겠거니와, 생각건대 나는 그들의 3대를 알고 있는데, 어느 사이에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과거를 회상함에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의 감회가 깊다. 받들어 구경하는 동안 슬픈 감회를 금할 길 없어, 이에 다음과 같이 찬한다.

아, 밝은 운한(雲漢)이 하늘에 그 모습을 나타내니, 그 빛이 아래로 덮이어 만물이 빛나도다. 임금의 글씨를 우러르니 오직 보물로 전하겠네. 누가 특별한 선물을 받았는가? 오직 신하로서 어진이로세. ‘배로 건넌다[舟楫之渡]’함은 그 기대가 컸던 것, 오직 그러한 실상이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하사하였도다. 이름은 남고 역사는 갔으니 슬픔만 감도누나. 자손은 대대로 잘 간수하여 영원히 영예를 보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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