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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화13

조선의 강리도(疆理圖)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壹疆理歷代國都之圖) 조선 태종(太宗) 2년(1402년)에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원본은 조선에 없고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명나라 지도를 요구해서 약탈당해 일본에 있다. 이 지도가 완성되기 까지는 그전 고려시대에 원나라 이택민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를 수입했고, 성교광피도는 그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원나라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성교광피도가 제작될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까지가 원나라의 성교광피도를 참고 했다보니 1398년 명나라(明國)에서 제작한 세계지도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와 매우 유사한 모습을 띠고있다. 대명혼일도 또한 원나라의 성교광피도를 참고 했다. 이 강리도는 조선에서 제작했다지만 어디까지나 고려의 힘이 있었고 원나라의 힘이 있었다. 여말선초시기 였으니 제작할수 있었던 것 뿐.. 2023. 9. 17.
조선왕조의 사냥놀이 연산군일기 27권, 연산 3년 9월 11일 기유 4번째기사 1497년 명 홍치(弘治) 10년 대사간 정석견 등이 왕에게 사냥을 중지하고 학문에 힘쓸 것을 간하다 성인의 학문에 전심하지 않고 나라의 정사엔 유의하지 않으시고, 기예(技藝)와 사냥놀이만을 일삼으시니, 신 등이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더구나 종친(宗親)과 사어(射御)하는 것은 다스리는 도(道)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유익됨이 없습니다. 임금은 백신(百神)의 주인으로서 만백성의 위에 계시는데, 어찌 종척(宗戚)들과 활쏘는 한 가지 재능만을 다투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크게 사체에 손상되는 일이오니 바라옵건대, 사냥놀이나 재주놀이를 일삼지 마시고 곧 명해서 날을 가려 알성(謁聖)을 하시고, 날로 경연과 조계(朝啓)에 납시옵소서." ------.. 2023. 8. 14.
중국인 섭정국의 행패 진법을 몰랐던 조선인들 https://iece12345.tistory.com/360 임진왜란 시절 - 조선인들은 문치로 인해 무(武)를 천시하다 보니 진법이나 병서를 전혀 모르던 민족 이었다. 그래서 중국인 중에 진법에 잘알던 섭정국 이란 사람을 극진히 대접하며 조선 병사들에게 진법을 훈련 시켜주기를 바랬는데, 그러긴 커녕 조선인들을 두둘겨 패며 오만 방자하게 굴어서 제발 돌아가 달라고 사정해야 했다. 글로 보아 이당시에는 조선의 풍수지리도 크게 쇠퇴했던 모양이라서 섭정국에게 조선 궁궐터를 묻고있다.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 4월 3일 경오 2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사신이 섭정국의 행적을 규탄하다 섭정국은 중국의 무뢰인으로서 경리(經理) 문하의 일개 편졸(褊卒)에 불과한데, 공.. 2023. 7. 20.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 - 번역 이 문구는 영국 화가 새비지 랜도어 A. Henry Savage-Landor 의 1895년 저서 " 코리아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 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은 1392년부터 1897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왕조의 이름인 조선(朝鮮)을 문자 그대로 "아침의 밝음"으로 시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한국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활력이 부족한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의 의미였다. From page 35 고려라는 국명은 조선사람에게 버려졌기 때문에 조선이란 국명은 원주민(natives)들이 국가에 부를수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이 국호의 뜻은 매우 싯적인데 ‘고요한 아.. 2023. 6. 28.
고려와 조선의 바둑그림 공민왕 기위도는 고려말 문화와 복식등 많은 참고가 된다. 서민부터 귀족까지 쓰고다녔던 문라건과 비단 도포, 의자를 사용했던 입식문화, 그당시 저택등을 알수있다. 그런데 조선으로 넘어간 후 밑에 두그림 처럼 문화가 변했다. 의자 하나로 저렇게 천박하고 미개해질수 있는것이다. 원시인이 의자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문명인이 될수 있는것처럼 말이다. 물론 세계사 적으로 로마가 망하고 중세 암흑기로 넘어가는 순간 문명이 퇴보하는 경우도 있다. 2023. 6. 25.
입식과 좌식 문화 서양 문화 - 입식 (귀족) 한국 전통 문화 - 좌식 (빈곤층) 한국 6,70년대 보면 거의 대부분 국민들이 저렇게 좌식 생활을 했다. 문재인이 다리 다 휘어져 버린것도 양반다리 좌식 생활을 너무 오랫동안 해서 그런거다. 솔직히 입식 생활 하면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은 없다. 실내화 신고 다니지 맨발로 생활 하는건 좌식에서나 해당된다. 사진 보면 알겠지만 한국이 너무 가난한 나라라서 좌식 생활을 했던거 뿐이다. 고려시대 기위도나 아집도 대련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한국도 입식 문화 였다. 그런데 입식에서 좌식으로 바뀐건 문명 발전 기준으로 봐서 이상한 일이다. 지금도 빈곤층 아니면 저렇게 그지 처럼 안산다. 나라가 점차 잘살게 되면서 입식문화로 바뀐거지, 요즘 세대도 보면 절대로 좌식 생활 안할려고 한.. 2023. 6. 22.
충혜왕의 소은병과 은화 유통 고려시대 은병화는 고액화폐로서 잘 이용되었다. 충혜왕 때는 소은병을 주조해서 휴대성이 간편화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은화가 전혀 이용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명나라에 막대한 금은 조공 때문이었다. 조선 이방원 8년에는 명나라에 막대한 금은 조공 때문에 은화유통을 금지 시켰고, 나중에 세종 1429년에는 조선팔도에는 금은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명나라에 거짓말을 해서 금광과 은광을 폐쇄한다.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忠惠王) 신미 원년(1331), 원 지순 2년 ○ 새로운 소은병(小銀甁)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한 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匹)에 해당하게 하였으며, 옛날에 만들어진 은병은 통용을 금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1권 / 정교전고(政敎典故) 전화(錢貨)와 면포(綿布)저폐(楮幣).. 2023. 4. 4.
조선시대 열화된 불교 이글에서 조선시대에 불교가 얼만큼 망가졌는지 알수있다. 그저 기복신앙 빼곤 다 없어졌다고 보면된다. 지금도 외국인이 한국의 불교를 보고 크게 실망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크게 성행했던 나라였는데 조선의 억불책이 얼만큼 효과적으로 발휘 됐는지 알수있다. ※유한부인(有閑夫人) - 한가한 부인 10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10(한국사료총서 번역서10)>1938년(무인년)>12월 3일《토요일》 청명. 서울 집. 오후 1시 홍병선, 황영수, 현동완과 함께 청량사에 갔다가 거기서 점심으로 냉면을 먹었다. 하지만 방이 너무 더럽고, 음식을 나르는 남자도 너무 지저분하고, 환경 전체가 너무 불결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역겹게 느껴졌다. 불교가 조선에서 타락할대로 타락했다. 소위 비구와 비구니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더러운지.. 2023. 2. 12.
조선시대 일본 과의 무역 조선은 쌀, 베, 인삼, 목화,(실絲도 있으나 목화로 실을 만든다)로 일본에서 구리, 납, 칼, 은, 거울 등을 교역한다. 다시 은을 가주고 중국에서 바늘, 털모자, 기타등등 을 수입한다. 이글에서 보면 조선은 구리 제련법을 모른다고 나와있다. 조선은 공업을 천시했던 나라다 보니 땅에서 나는 농업품을 가주고 공업품을 수입하는건 문제가 있다. 그래서 나라가 가난할수밖에 없는거다. ​ 성호이익 [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사설 제8권 인사문(人事門) 생재(生財) 남쪽으로 왜인(倭人)과 교역(交易)하는데, 국가에서 하는 공무(公貿)와 개인이 하는 사역(私易)이 있다. 공무는 우리의 쌀과 베[布]로써 저들의 동(銅)과 납(鑞)을 교역하고, 사무는 우리의 인삼(人蔘.. 2023. 2. 5.
세종시대 발명품 외바퀴 수레 보기엔 저래도 종 2품 재상만 탈수 있었던 최고급 세단이다. 세종때 발명되고 나라 망할때 까지 관리들이 타고다녔다. 초헌(軺軒) - 종 2품의 관리가 타는 외바퀴가 달린 가마 ※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 3월 23일 을축 2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상의원에 재상들이 탈 초헌과 일산을 만들게 하다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초헌(軺軒)과 일산[蓋]을 만들게 하였으니, 재보(宰輔)들에게 초헌을 타게 하려 함이었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4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신개에게 초헌을 주고, 2품 이상은 초헌을 타게 하다 영의정 황희(黃喜)와 우의정 신개(申槪)에게 초헌(軺軒)을 주고, 인하여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이제부터는 이품.. 2022. 12. 22.
단청도 못칠했던 가난한 나라 요점 정리 1. 중기 이후 청기와 만드는법이 잊혀져서 고종년도에는 아는자가 없다. 2. 인조때 만든 선정전의 청기와가 수백년되었다. 중국 북경의 가옥은 대다수 채색기와 3. 임진란 이후 재력이 없어 단청도 못칠하게 금지했다.[단청-채색] 4. 임진란 이후 재력고갈로 관리의 녹봉도 삭감하여 10분에 1에 지나지 않는다. 7. 관서[평안도]와 관북[함경도]은 상납하는게 없다. 2도를 뺀 나머지 6도가 70만결미만, 서북도는 나머지 6도에 비해 헐하여 조세를 매길수 없다. 세금을 걷어도 관청의 운영과 급료 및 허다한 공공 경비로 쓴다. ​ 승정원 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동치13) 5월 12일(계축) 비 중희당에서 일강할 때 강관 김세균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이르.. 2022. 12. 21.
조선팔도 사냥 다녔던 세종 대동야승 기재잡기 1(寄齋雜記一) 역대 조정의 옛이야기 1[歷朝舊聞一] 세종 우리 나라의 예악 문물이 세종 때부터 융성하기 시작하였고 또한 크게 갖추어졌으며, 여러 임금들이 잇달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내가 일찍이 세종 때의 주서(注書)의 《일기초(日記草)》를 보니, 상감께서 친히 양성ㆍ진위ㆍ용인ㆍ여주ㆍ이천ㆍ광주 사이를 사냥 다녔는데, 때로는 한달이 지나서야 돌아오셨다가 이튿날 또 떠나곤 하였다. 길가의 시골 백성들이 더러는 푸른 참외를 드리기도 하고 더러는 보리밥을 드리기도 하였는데, 그러면 반드시 술과 음식으로 답례하였다. 《일기》책머리에는 여섯 사람의 대언(代言)과 두 사람의 주서의 성을 죽 써 놓으면서도 그 이름은 쓰지 않았고, 좌대언(左代言) 밑에는 진한 먹으로 크게 써 놓.. 2022.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