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경쇠는 매우 아름다워서 송나라에서도 유명했다. 경쇠는 사찰에서 사용되는 법음구다. 현재 한국에서는 조선시대 경쇠만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불교문화의 전성기였던 고려시대와는 비교는 불가능 하다. 북한에 고려시대 경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글 중간 부분에 이덕무의 사견은 일단 무시하는게 좋다. 왜냐하면 역사라는 것은 시대가 멀리 떨어질수록 오차가 생긴다. 이덕무는 조선후기 사람인데 고려시대 경쇠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훈민정음 같은 경우도 동시대 사람이 언문 창제에 대해 전혀 모르다보니 실록에 해례본에 실려있는 어제와 서문이나 축약해서 적어 넣었을 정도였다.
조선후기 이덕무의 저술집
※ 거서(秬黍) - 검은 기장
청장관전서 제57권 / 앙엽기 4(盎葉記四)
고려(高麗)의 경쇠[磬]
세종조(世宗朝)에서는 남양(南陽)에서 나는 석경(石磬)과 해주(海州)에서 생산되는 거서(秬黍)로 악률(樂律)을 정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성세(盛世)의 상서로운 화응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고려경(高麗磬)은 이미 송 나라 조정에서도 유명했었다. 그러면 고려 때에 남양에서 이미 경쇠의 재목이 생산되었었는데, 중간에 폐절(廢絶)되었다가 세종조 때에 이르러서 다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또한 고려 때에는 다른 곳에 경쇠를 생산하던 땅이 또 있었던 것인가? 이제 고려경에 대한 한 토막을 기록한다. 《휘주록(揮麈錄)》 송(宋) 나라 왕명청(王明淸)이 지었다. 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우(元祐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초엽에 양강공(楊康功)이 고려(高麗)에 사신 갈 때에 금문(禁門)에 있는 제공(諸公)들을 작별하면서 그들에게 부탁할 것이 있느냐고 물으니 다 말하지 않았는데, 유독 채원도(蔡元度)가 ‘고려의 경쇠는 매우 아름다우니 돌아올 때 번거롭더라도 나를 위하여 경쇠 1구(口)만 가져다 주시오.’ 하였다. 오래지 않아 강공(康功)이 돌아올 적에 마침내 경쇠와 기교(奇巧)한 물건을 채원도 집에 가져다 주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강공이 웃으면서 ‘내가 바다를 건너갈 때에 제공들은 다 내가 큰 바다에 빠져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으므로 나에게 부탁도 않았지만 원도의 마음은 오히려 내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나는 애오라지 그 뜻에 보답한 것이다.’ 했다.”
[주-D001] 거서(秬黍) : 검은 기장[黑黍]을 말한다. 《이아(爾雅)》 석초(釋草)에 “거(秬)는 흑서(黑黍)다.” 했고, 소(疏)에 “흑서(黑黍)는 일명 거서(秬黍)인데, 거(秬)는 바로 흑서중에 큰 것을 말한다.” 하였다.
'고려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시대 금강령과 금강저 (0) | 2023.04.28 |
---|---|
고려시대 식목 산업 (0) | 2023.04.27 |
고려시대 경복궁 (0) | 2023.04.14 |
황산대첩 악장 궁수분곡 (0) | 2023.04.13 |
위화도 회군 악장 (0) | 2023.04.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