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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귀주대첩 강감찬 열전

by afsefe 2022. 12. 28.

글 하단에 강감찬이 어떻게 생겼는지 쓰여있다. 지금 강감찬 동상은 무신처럼 꾸민 가짜다. 원래 강감찬은 문신으로서 체구가 작고 못생겼다. 

 

국역 고려사 : 열전
강감찬[ 姜邯贊 ]
강감찬(姜邯贊)은 처음 이름이 강은천(姜殷川)이며 금주(衿州 :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사람이다. 5대조 강여청(姜餘淸)이 신라에서 이주하여 시흥군(始興郡 :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에 살게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금주이다. 부친 강궁진(姜弓珍)은 태조를 섬겨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 성종 때 과거 갑과(甲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현종 원년(1010) 거란(契丹)의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서경(西京)을 공격했는데, 아군이 패했다는 소식이 오자 신하들이 항복을 발의했다. 그러나 강감찬만은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康兆)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하고 주장하며 왕에게 남쪽으로 피난하도록 권하였다.

2년(1011)에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옮기고 중추사(中樞使)로 승진하였다. 이 때 사직단(社稷壇)을 수리하고 예관(禮官)에게 그 제사의 의례를 의논하여 정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렸다. 이어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전임되었는데, 왕에게 아뢰어 자신이 개녕현(開寧縣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소유한 밭 12결을 군호(軍戶)에게 주었다.

9년(1018)에 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될 때 왕이 손수 고신장에,
“경술년(현종 원년, 1010)에 거란 오랑캐가 전쟁을 일으켜, 한강(漢江) 곁에까지 깊숙이 침범해 왔노라. 당시에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모두 야만인이 되었으리.”
라 쓰니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큰 영예로 여겼다.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내침할 당시 10만 대군이라 했는데, 당시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되었다. 왕은 그를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柳參)을 판관(判官)으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 :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피현군 백마 동쪽)에 이르러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 동아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 적이 다가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자 강민첨은 자주(慈州 : 지금의 평안남도 순천시)의 내구산(來口山)까지 쫓아가서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또 시랑(侍郞) 조원(趙元)은 마탄(馬灘)에서 재차 공격하여 1만 명 넘게 목을 베었다.

이듬해 정월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진군해 오자, 강감찬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으로 하여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급히 개경으로 들어가 수비하게 했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도 군사 3천 3백 명을 원군으로 보냈다. 이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 연주(漣州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위주(渭州 : 지금의 평안북도 녕변군)에 이르자 강감찬 등이 기습하여 5백 명 넘게 목을 베었다. 2월에 거란군이 귀주(龜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를 통과하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요격했는데, 양군(兩軍)이 막상막하로 승패를 결정짓지 못했다.

김종현이 군사를 인솔해 전투지로 향하자,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드디어 패주하기 시작했다. 아군이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추격했는데,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낙타·갑옷·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거란의 왕이 패전 소식을 듣고 대노해 사자를 소손녕에게 보내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적국 깊이 들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려는가? 짐은 너의 낯 가죽을 벗긴 뒤에 죽일 것이다.”고 꾸짖었다.

강감찬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바치니 왕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임시로 만든 채색 누각에 풍악을 준비하여 장사들을 위한 잔치를 열어 주었으며,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왕이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서 위로와 감탄의 말을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은 큰 절로 감사를 올리며 몸 둘 바를 몰랐다. 역의 이름을 흥의역(興義驛)으로 고쳐 승리를 기념하고, 또 역리(驛吏)에게 주리·현리와 같은 관과 옷띠를 내려주었다.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검교태위(檢校太尉)·문하시랑 동 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으로 올려 주고 식읍(食邑) 3백호를 주고, 또 추충협모 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현종 11년(1020)에 다시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자 허락하고, 특진(特進)·검교태부(檢校太傅)·천수현개국자(天水縣開國子)로 올려 봉하고 식읍을 5백호로 올려 주었다. 강감찬이 수도에 성곽이 없으므로 나성(羅城)을 쌓자고 청하자 왕은 그 건의에 따라 왕가도(王可道)에게 나성을 쌓게 하였다. 21년(1030)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였다.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의 칭호를 주고 특진(特進)·검교태사(檢校太師)·시중(侍中)·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로 봉하고 식읍을 1천호로 올려 주었다. 그 얼마 뒤 여든 네 살로 죽으니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백관들에게 명령을 내려 장례에 참석하게 하고 제문과 부의는 모두 시중 유진(劉瑨)의 의례에 따르게 하였다.

이런 설화가 세상에 전해 온다.

“왕이 보낸 어떤 사자가 밤중에 시흥군으로 들어오다가 큰 별이 인가(人家)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관리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그 사자가 기이하게 여기고는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와 길렀는데, 이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었다고 한다.”

재상으로 있을 때 송나라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절을 올리며 “문곡성(文曲星)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더니 바로 여기에 있었구려!”라고 말했다. 강감찬은 성품이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 체구가 작은데다가 얼굴이 못생겼으며 의복은 더럽고 해어져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엄숙한 얼굴로 조정에 서서 국가대사가 생길 때마다 정책을 결정지으며 나라의 우뚝한 기둥이자 초석 역할을 하였다. 당시 풍년이 들고 백성이 편안하며 나라 안팎이 무사하자, 사람들은 그 모두가 강감찬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관직에서 물러나자, 성남(城南) 별장[別墅]으로 돌아가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을 저술하였다. 뒤에 현종의 묘정에 배향하였고, 문종은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을 추증하였다. 아들은 강행경(姜行經)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감찬 [姜邯贊]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문곡성 : 문곡(文曲)·문성(文星)·문창성(文昌星)이라고도 하며, 술수가들이 점성술로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데 활용하는 9개의 별 가운데 네 번째 별이다. 녹존성(祿存星)의 다음과 염정성(廉貞星)의 위에 위치하며, 주로 글과 관련된 문운(文運)을 맡고 있다. 『동관주기(東觀奏記)』에는 “이경량이 아뢰기를 ‘문성이 어두우니 과거장에 일이 생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李景亮奏 文星暗 科場當有事).”고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감찬 [姜邯贊]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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