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는 소설 홍길동전 시대배경이 된만큼 도적들이 많았다. 단순히 없어보이는 이유는 고려말 처럼 일부러 악화시켜 보이게 안했기 때문이다. 도적들이 약탈하는거 하나하나 적어봐라 얼마나 많아 보이겠냐, 사관이 쓰기 나름이다. 그러니 고려사는 승리자의 역사서로 불리는거다. 세종시대 도적은 명화적(明火賊)으로 유명하다. 수도의 관서까지 털어먹었을 정도였는데 고려시대도 이정도까진 아니였던걸로 안다.
※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4일 무인 1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절도죄의 처벌과 천구의 관직 제수에 관한 사간원의 상소문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1. 서경에 이르기를, ‘무리를 지어 내외에서 구적(寇賊)을 자행하는 자는 무릇 백성으로서 원망하지 않는 자 없다. ’고 하였습니다. 대저 옛날의 구적이란 곧 오늘의 절도(竊盜)이온데, 이들은 결코 용렬하고 우매한 사람이 아니고, 모두가 흉악하고 강력(强力)한 무리들입니다. 마냥 놀면서 힘쓰지 아니하고 이욕(利欲)을 한없이 탐하여, 산업에 종사하지 않고 오직 도절(盜竊)에만 힘써, 낮에는 종적을 감추고 밤이면 나타나 가만히 앉아서 풍의(豐衣)·미식(美食)을 얻고 있사온데, 그들이 도둑질을 감행할 때에 강한 자가 이를 잡으면 반드시 숙원(宿怨)을 맺게 되고, 약한 자가 이를 잡게 되면 도리어 보복을 당하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하여 잡지 않거나, 또 꺼려하여 고발하지 않는 자도 자못 많사오며, 비록 고발하여 체포한다 하더라도, 그 형벌이 결장(決杖)이나 자자(刺字)에 불과합니다.[중략] 이로 말미암아, 서울 오부(五部) 내에서 도둑을 맞는 집이 없는 날이 없고, 이를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리곤 하옵더니, 그 버릇이 자라서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도둑질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오라, 그 전날에 도둑을 다스리는 법이 엄하지 않았던 까닭입니다. [후략]
※고려시대 가짜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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