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종시대

세종시대 권채 첩 살인사건

by afsefe 2023. 3. 19.

집현전에 소속해 있던 권채 란 양반이 그의 노비첩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세종은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 세종시대 보면 양반들이 부정부패 저질러도 세종은 잠시 귀양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여서 사용했다. 조선이란 나라를 보면 법위에 양반이 있는 나라다. 이런 나라는 법치가 바로설수 없다. 초기부터 이러다 보니 나중가서는 양반들이 사사로이 뇌물이 오고가고, 고리대를 하는등 부정부패가 심각해 진거다. 

1. 권채의 노비가 시체를 짊어지고가다. 세종은 권채를 옹호하고있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0일 을해 5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집현전 응교 권채의 잔혹한 행적에 대해 조사하라고 명하다

형조 판서 노한(盧閈)이 계하기를, 

"신(臣)이 길에서 한 노복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형용과 비슷은 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놀라서 물으니,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의 가비(家婢)인데, 권채가 그의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가두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본조(本曹)에서 이를 조사했으나 마치지 못하여 즉시 계달(啓達)하지 못했사오니, 그의 잔인(殘忍)이 심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권채를 성질이 안존(安存)하고 자세한 사람으로 여겼는데, 그가 그렇게 잔인했던가. 이것은 반드시 그 아내에게 제어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니 모름지기 끝까지 조사하라." 하였다.

2. 첩을 잔인하게 죽이는 권채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4일 기묘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집현전 응교 권채를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다

형조에서 계하기를,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는 일찍이 그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여종이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하여 휴가를 청하여 얻지 못하였는데도 몰래 갔으므로, 권채의 아내 정씨(鄭氏)가 권채에게 호소하기를,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해 갔습니다.’ 하니, 권채가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 속에 가두어 두고 정씨가 칼을 갈아서 그 머리를 베려고 견주니, 여종 녹비(祿非)란 자가 말하기를, ‘만약 이를 목벤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함께 알게 될 것이니, 고통을 주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정씨가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하여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더니, 오줌과 똥에 구더기가 생기게 되므로 덕금이 먹지 않으려 하자 이에 침으로 항문을 찔러 덕금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수개월 동안 침학(侵虐)하였으니, 그의 잔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원컨대 권채의 직첩을 회수하고 그 아내와 함께 모두 잡아와서 국문하여 징계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했는데, 판부사 변계량(卞季良)·제학 윤회(尹淮)·총제 신장(申檣)의 계에 의하여, 드디어 고쳐 명령하여 직첩은 회수하지 말게 하고 의금부에 내리어 국문하도록 하였다.

3. 비첩을 죽인죄로 권채는 먼곳에 귀양보내고 , 아내만 장 90대에 처하다. 

그러나 좀있다가 다시 복귀시켰다. 보통 귀양시킨후에 다시 복직시킨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3일 무자 2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의금부에서 비첩을 학대한 권채와 그의 아내의 형벌을 정하여 아뢰다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권채(權採)가 비첩(婢妾) 덕금(德金)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鄭氏)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肛門)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곤고(困苦)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鄭氏)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하니, 권채는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부처(付處)시키고,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4. 사이코 살인마의 죽음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5월 10일 계사 1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승정원 우승지 권채 졸기

우승지 권채(權採)가 죽으니, 명하여 쌀 20석과 콩 10석, 종이 1백 권(卷), 관곽(棺槨) 등을 부의(賻儀)로 내렸다. 권채는 죽은 부윤(府尹) 우(遇)의 아들로 소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장성함에 이르러 시문(詩文)을 다 잘하여 권제(權踶)와 더불어 문장의 전형(銓衡)을 받아 왔는데, 나이 겨우 40에 죽어 사람들이 경악 탄식하였다.

'세종시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세종 중국사신 영접 절차 2  (0) 2023.05.24
세종시대 왕자를 폭행한 임수  (0) 2023.03.23
일본에 줄려고 했던 팔만대장경  (0) 2023.03.12
조선의 속국 의식 절차  (0) 2023.02.17
중국 속국의 현실  (0) 2022.12.3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