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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시대

박진 중국인 에게 맞아죽다

by afsefe 2023. 3. 25.

너무 끔찍한 내용이어서 , 선조수정 실록이나 기타 여러 선비들 문집에서는 기록이 없는데, 간신히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취급이나 당하고 살았는지 알수있다. 

 

선조 88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경립이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도 노모가 있으니 구휼하는 은전(恩典)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에게 노모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지금 적성(積城)의 무덤 아래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진 왜란에 여러 고을들이 바람에 쓰러지듯 도망쳐 숨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박진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혼자서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대적을 막으려 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의기는 여러 장수들에 비하여 탁월한 것이었다. 】

상이 이르기를,

“늠료(廩料)[벼슬아치 봉급]를 주려고 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홍계남의 예와 같이 늠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점이 아뢰기를,

“박진을 구타한 중국 장수는 누승선(婁承先)입니다.”

하자, 준겸이 아뢰기를,

“박진의 뼈가 부러진 곳을 신도 보았습니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말하지 못하다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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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 - 인명록

박진(朴晉) : ?~1597. 본관은 밀양.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의열(毅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소산(蘇山)을 지키다가 패하여 성안으로 돌아왔다가, 적병이 밀려오자 성에 불을 지르고 후퇴하였다. 이어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영천(永川)의 적을 야습(夜襲)하여 수천 명을 살해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봉해졌다. 또 안강(安康)에서 장군회의를 열고 16읍(邑)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쳤으나, 병사 약 500명을 잃고 후퇴하였다. 한 달 뒤 신예 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퍼부어 경주성을 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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