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경복궁 https://iece12345.tistory.com/268
최근에 서울에서 고려시대 궁궐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는 수도가 세개나 있었기 때문에 현재 안알려진 고려시대 궁궐들이 많다. 조선의 경복궁 이름또한 원래는 고려시대 궁궐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거다. 그러나 새 나라를 건국 하고서 대표 궁궐 이름을 짓는다면서 그전에 있던 궁궐 이름을 그대로 갖다쓴건 웃긴일이다. 그것도 지들이 그렇게 부정했던 고려시대를 말이다. 근데 이글의 셋째줄을 보면 그전에 있던 궁궐 이름을 고쳐부르거나 그대로 갖다 쓰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쓰여있다. 이말을 볼때 경복궁 이란 이름을 일부러 그대로 갖다 쓴걸로 보인다. 고쳐 부른 사례를 보면 광해군때 지은 경희궁도 고려 궁궐 이름에서 한자만 고쳐쓴거다. 그러나 경희궁은 부속 궁궐이고 이름만 고쳐서 지었다지만, 새나라를 건국 하고 정궁(正宮)이름을 짓는다면서 고려시대에 심심 풀이로 지어놓은 궁궐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쓴건 얼빵한 일이다. 이러니간 마지막 까지 고려시대를 못넘은거다. 선조는 고려시대와 비교하며 자신의 나라를 개탄 했고, 광해군은 고려의 역사를 본받아서 국난을 이겨낼려고 했다. 뭐든지 스타트를 잘끊어야 하는데 대표궁궐 짓는 다면서 고려시대 꼬붕이 궁궐 이름을 붙여놓으면 되겠냐
- 이글은 조선실록에도 그대로 나와 있는 내용이다.
정도전 문집
삼봉집 제4권 / 기(記)
경복궁(景福宮)
신은 상고하건대, 궁궐이란 임금이 정사를 다스리는 곳이요, 사방이 우러러보는 곳이요, 신민들이 다 나아가는 곳이므로, 제도를 장엄하게 해서 위엄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지어 보고 듣는 자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ㆍ당(漢唐) 이래로 궁전(宮殿)의 호칭이 혹은 전에 있던 이름을 따기도 하고 혹은 고쳐 부르기도 하였으나, 그 존엄성을 보이고 감동을 일으키게 한 바는 그 의의가 동일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3년이 되던 해,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시고 먼저 종묘(宗廟)를 세운 다음 궁전을 건립했습니다. 그 이듬해 10월 을미일에 상께서는 친히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고 선왕(先王)ㆍ선후(先后)에게 새 종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어 군신들에게 새 궁전에서 잔치를 여셨습니다. 이것은 대개 신(神)의 은혜에 감사하며 미래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술이 세 순배가 돌자 신 도전(道傳)에게 명하시기를,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사 지내고 새로운 궁전이 낙성되어 여러 군신들과 잔치를 열게 되었으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길이 빛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삼가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주아(周雅 《시경》 대아(大雅)와 소아(小雅))에서, ‘술대접 받아 실컷 취하고 또 많은 은덕을 입었으니, 비옵니다 군자께서 만년 장수하시고 큰 복[景福] 받으시기를’이라는 시구를 인용하여, 새 궁전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짓기를 청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전하께서는 자손들과 더불어 만년이나 태평한 왕업을 누리게 될 것이며 사방의 백성들도 길이 보고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춘추》에서 백성에게 부역시키는 것이나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일들을 몹시 삼가고 중난하게 여겼으니, 임금이 된 이가 백성만을 부려 스스로를 받들게 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아서는 안되오니, 한가로이 넓은 집에 있을 때는 한사(寒士 가난한 선비)를 비호할 것을 생각하고, 서늘한 양생(凉生)이 구본에는 생량(生凉)으로 되었음.전각(殿閣)에 어떤 본에는 전합(殿閤)으로 되어 있음. 있으면 그 맑은 그늘을 나누어 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만민(萬民)이 받듦에 저버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아울러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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