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인들이게 전혀 안알려져 있다가, 이번 드라마로 알려지게된 고려시대 위인, 근데 그도 그럴것이 고려시대 이순신 이라고 불리면 딱 맞겠다. 그래서 강감찬 같은 위인에게 가려져 있던게 아닌가, 이순신도 한국에서 전혀 안알려져 있다가 박정희가 자신의 군부 정권 찬양할려고 성웅화 시켜주며 띄워준거다. 거란 임금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공해서 강조가 이끌던 고려 30만 대군을 격파하고 개경을 함락 했다, 피난 중이던 고려 현종은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강화를 맺었고, 거란은 퇴군중에 양규 장군이 활약해서 싸웠다. 사로 잡혔던 고려 포로들을 구출하고 연전 연승을 거두면서 거란에게 데미지를 입히다가 마지막에 많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순신이 퇴군중인 왜군과 싸우다가 죽은것 처럼, 양규 장군도 물러나는 거란군과 싸우다 죽은거다.
국역 고려사 : 열전
양규
[ 楊規 ]
한자 원문 한글 번역문
양규(楊規)는 목종 때의 관리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낭중(刑部郎中)이 되었다. 현종 원년(1010)에 거란 임금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강조(康兆)를 치고 흥화진(興化鎭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피현군 백마)을 포위하자, 양규가 도순검사(都巡檢使)가 되어 흥화진사(興化鎭使)·호부낭중(戶部郎中) 정성(鄭成)과 흥화진부사(興化鎭副使)·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 및 판관(判官)·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거란 임금은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의 성 밖에서 추수하는 남녀를 사로잡아 각자 비단옷을 내려주고 종이로 감싼 화살 한 개를 주어 군사 3백여 명으로 하여금 흥화진까지 호송하여 항복을 권유하게 하였다. 화살을 싼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전 왕 왕송(王誦 : 목종)이 우리 조정에 복속하여 섬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아이를 세웠기 때문에 짐이 친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이미 국경까지 당도했다. 너희들이 강조를 체포하여 짐 앞으로 보내면 그 즉시 회군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개경(開京)으로 쳐들어가 너희 처자들까지 모조리 죽일 것이다.”
또 다른 편지를 화살에 매어 성문에 꽂았다.
“흥화진의 성주(城主) 및 군인과 백성에게 칙명을 내린다. 전 왕 왕송은 그의 조부를 이어 우리에게 복속해 번신이 되어 봉토를 굳게 지켜왔다. 그러나 갑자기 간흉에게 시해를 당했으므로, 짐이 정예군을 거느리고 와서 죄인을 치는 것이다. 그 나머지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모두 죄를 용서해 줄 것이다. 너희들은 전 왕이 베푼 후덕한 은혜를 받아 역대에 일어났던 순종과 반역의 이유를 알 것이니 마땅히 짐이 마음 속에 품은 것을 깨달아 후회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수화(李守和) 등이 거란 임금에게 표를 올렸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간흉을 제거해야 할 것이며, 어버이를 봉양하고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절조를 굳게 가져야 할 것이니, 만약 이 도리를 어기면 반드시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아래로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 페하의 밝으신 지략을 돌려주십시오. 하늘이 악인을 잡는 그물을 폐하께서 크게 열어두시고서 어찌 참새같은 작은 새가 먼저 뛰어들기를 바라십니까? 계속 정벌의 준비를 하신다면, 용맹스러운 군사[貔貅]가 절로 복속해 올 것입니다.”
거란 임금이 비단옷과 은그릇 등속을 흥화진의 우리 장수들에게 계급별로 차등을 두어 주고서 다시 편지를 보내 왔다.
“그대들이 올린 표문에서 아뢴 것을 모두 살펴보았다. 짐은 우리 다섯 성군[五聖]을 계승하여 온 천하를 다스리고 있는 바, 충성스럽게 순종하면 반드시 표창해 주고 간악하게 반역하면 반드시 정벌하여 주륙하였다. 강조가 옛 왕을 시해한 다음 어린 왕을 끼고 간악한 권세를 방자히 휘두르면서 사람들을 마구 복속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짐이 친히 정벌해 죽임으로써 형정을 바르게 행하기 위해 이제 모든 군사들을 거느리고 국경 가까이 왔다.
얼마 전 특히 짐이 윤음을 보낸 까닭은 그대들을 불러 잘 달래보려는 나의 뜻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올린 글을 보아하니 귀순하겠다는 정성은 도무지 볼 수 없다. 피력한 내용이 성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문장도 겉으로만 공경하는 체했을 따름이다. 하물며 그대들은 일찍부터 관직[簪裾]에 있었으니 필시 순종과 반역의 차이를 알 것인데, 어찌 역적 도당의 음모를 도와주고 전 왕의 죽음을 설분하지 않으려는가? 마땅히 안위를 돌이켜 보고 미리 화복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이수화(李守和)가 다시 답장을 보냈다.
“저희 신들은 과거 조서를 받들 때마다 변치 않는 마음을 밝혀 왔습니다. 우리 백성들을 아끼시는 어진 마음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오며, 또한 괴로움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풀어주는 인자하신 마음을 절실히 기원합니다. 우리는 어떤 고난이라도 이기면서 더욱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이며, 분골쇄신하여 길이 천년의 성스러운 왕업을 받들 것입니다.”
거란 임금은 표문을 보고 우리가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서 포위를 풀었다. 그리고 다시 “너희들은 백성을 안정시키고 기다려라.”는 글을 보낸 뒤 20만 대군을 인주(麟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남쪽 무로대(無老代)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 :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까지 진격하였다.
거란 임금이 군사를 동산(銅山) 아래로 이동시키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싸우다가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事) 이현운(李鉉雲)과 행영도통판관(行營都通判官) 노전(盧戩) 및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포로가 되었고, 행영도병마부사(行營都兵馬副使) 노정(盧頲),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 등이 진영에서 전사하니 아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거란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해와 3만여 아군의 목을 베니 버려진 군량과 병장기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때 거란 군사들은 말을 타고 멀리까지 추격했는데, 좌·우기군 장군(左右奇軍將軍)인 김훈(金訓)·김계부(金繼夫)·이원(李元)·신녕한(申寧漢)이 완항령(緩項嶺)에 군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모두 칼을 휘두르며 급습해 쳐부수자, 거란군이 잠시 퇴각했다.
거란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흥화진에 보내어 항복하라고 설득하였으나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명령은 받지 않겠다.” 하며 항복하지 않았다. 거란이 다시 노전 및 합문사(閤門使) 마수(馬壽)로 하여금 격문을 휴대하고 통주로 가게 해 항복을 권유하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과 홍숙(洪淑)이 분연히 일어나 노전과 마수를 억류한 뒤 방어사(防禦使) 이원구(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대장군(大將軍) 채온겸(蔡溫謙), 판관(判官) 시거운(柴巨雲)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제야 하나가 되었다.
거란 군사들이 곽주(郭州 :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로 침입하자 방어사(防禦使)·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조성유(趙成裕)는 밤중에 도주해버리고, 신녕한 및 행영수제관(行營修製官) 승리인(乘里仁), 대장군 대회덕(大懷德), 공부낭중(工部郞中) 이용지(李用之), 예부낭중(禮部郞中) 간영언(簡英彦)은 모두 전사하여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거란이 군사 6천 명을 잔류시켜 수비하게 했는데, 양규가 흥화진으로부터 군사 7백여 명을 이끌고 통주까지 와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하였다. 밤중에 곽주로 잠입하여 잔류한 거란 병사들을 급습하여 모조리 죽인 후 성 안에 있던 남녀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겼다.
이듬해 거란 임금이 개경으로 침입해 궁궐을 불사르고 퇴각하였다. 귀주별장(龜州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중랑장(中郞將) 보량(保良)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양규는 거란군을 무로대(無老代)에서 습격하여 2천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2천여 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梨樹)에서 전투를 벌인 뒤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천 5백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 명을 되찾았다. 사흘 뒤에 다시 여리참(余里站)에서 싸워 1천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 명을 되찾았다. 이 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다시 그 선봉을 애전(艾田)에서 요격해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얼마 뒤 거란 임금이 지휘하는 대군이 갑자기 진군해오자 양규는 김숙흥과 함께 종일 역전했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거란군은 아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데다 큰 비로 인해 말과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모두 망실되자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퇴각하기 시작했다. 정성(鄭成)이 추격하다가, 적군이 강을 반쯤 건너자 후미에서 공격하니 매우 많은 거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이로써 항복했던 성을 모두 수복하였으며, 특히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달 사이에 모두 일곱 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3만여 명을 되찾았으며, 말과 낙타와 병장기를 노획한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전공으로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처인 은률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는 곡식을 지급하였으며,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손수 다음과 같은 교서를 지어 홍씨에게 내려주었다.
“그대 남편은 장군으로서의 지략을 갖추었고 또 올바른 정치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항상 송죽과 같은 절개를 지니고서 끝까지 나라에 충성을 바쳤으니, 그 충정은 비할 데가 없었으며, 밤낮으로 노고를 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북쪽 국경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군(中軍)에서 용맹을 떨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는 돌과 화살을 압도하였고, 원수를 추격하여 생포하니 그 힘으로 국토를 안정시켰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다. 이로부터 성과 진이 온전할 수 있었으며,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씩씩해졌다.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불행히도 전사하였도다. 빼어난 전공을 항상 기억하여 이미 공에 따라 벼슬을 올렸으나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을 간절히 하여 더욱 널리 알리고자 한다. 그대에게 해마다 벼와 곡식 1백 석을 종신토록 내려줄 것이다.”
김숙흥(金叔興)에게는 장군을 추증했으며, 또 그의 모친 이씨(李氏)에게 곡식을 지급하게 하고 교서를 내렸다. 교서의 글은 다음과 같다.
“추증한 장군 김숙흥은 변방의 성을 지킬 때부터 적과 용감히 싸워 파죽지세의 승리로 전공을 세웠으나, 복병이 쏜 화살에 맞아 끝내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과거의 노고를 기념하여 마땅히 후한 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이에 그의 모친에게 매년 곡식 50석을 종신토록 주노라.”
현종 10년(1019) 양규와 김숙흥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내려주고, 15년(1024) 다시 두 사람에게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문종이 즉위하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대중상부(大中祥符 : 송나라 眞宗의 연호) 3년(1010) 거란이 침략했을 때 서북면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와 부지휘(副指揮) 김숙흥 등은 몸을 바쳐 힘껏 싸워 연전연승하였으나, 화살을 온 몸에 맞고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였다. 그 전공을 추념하여 마땅히 표창해야 할 것이니,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을 걸어서 뒷사람들에게 권장하도록 하라.”
[네이버 지식백과] 양규 [楊規]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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