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성(江東城) - 평양부근
1216년 - 1218년
1. 거란 9만여명은 강동성을 빼앗고 웅거하였다.
2. 고려는 이들과 맞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3. 고려, 몽골 , 동진 연합군이 거란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1. 거란 9만여명은 강동성을 빼앗고 웅거하였다.
[원사]
○ 그 임금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처음 나라를 세워 당(唐)나라 건봉(乾封) (A.D.666~667; 高句麗 寶藏王 25~26) 초기(初期)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였다.수공(垂拱)(A.D.685~688; 新羅 神文王 5~8) 이후 자손들이 다시 그 땅에 봉작(封爵)되어 차츰 자립하였다. 오대(五代) 때에 이르러 대신 그 나라의 임금이 되어 수도를 송악(松岳)으로 옮긴 사람의 성(姓)은 왕씨(王氏)이며 이름은 건(建)이다. [왕(王)]건(建)으로부터 도(燾)충숙왕(忠肅王)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27왕(王)인데, 4백여년이 지나도록 한번도 [왕실(王室)의] 성(姓)이 바뀐 적이 없었다. 원(元)나라 때에 들어와 태조(太祖) 11년 거란(契丹)사람 김산(金山)과 [원(元)]의 원수(元帥)인 육가六哥등이 9만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그 나라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12년 9월에 강동성(江東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그 땅에 웅거하였다.
2. 고려는 이들과 맞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신원사]
○ 태조(太祖) 11년(A.D.1216; 高麗 高宗 3)은 철(㬚)이 즉위한 3년째 되는 해이다. 거란(契丹) 사람 아아(鵝兒)· 걸노(乞奴)등이 몽고(蒙古)를 배반하여 군사 수만(數萬)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녕덕삭주(寗德朔州)를 침범하였다. 이 무렵 금(金)의 선무사(宣撫使)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遼東)에 웅거하여 천왕(天王)이라 참칭하며 국호(國號)를 대진(大眞)이라 하였다. 이에 금(金)나라 사람들이 두 번이나 고려(高麗)에 통첩(通牒)을 보내면서, 곡식을 판매해주어 군량에 충당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빌었으나 고려(高麗)에서는 응하지 않았다. 아아(鵝兒)· 걸노(乞奴) 등은 안주(安州)· 의주(義州)· 귀주(龜州)로 쳐들어가 노략질하고서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하였다. 그리고 고려(高麗)에 글을 보내 대요(大遼)라 자칭하였다. [고려(高麗)의] 서경(西京) 군사는 이들을 맞아 싸워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3. 고려, 몽골 , 동진 연합군이 거란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신원사]
○ [태조(太祖)] 12년(A.D.1217; 高麗 高宗 4)에 금(金)에서 재차 통첩(通牒)을 보내, “반적(叛賊) 만노(萬奴)는 본시 거란(契丹)과 한마음이니 만일 군사를 합병하여 귀국(貴國)을 침입하게 되면 그 걱정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와 귀국이 협공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얼마 후 만노(萬奴)가 과연 대부영(大夫營)을 군대로 함락시켜 버렸다.
[태조(太祖)] 13년에 태조(太祖)가 합진(哈眞) 및 찰자역아태(札刺亦兒台)에게 군사 일만(一萬)을 거느리고 가게 하여, 만노(萬奴)가 보내온 완안자연(完顔子淵)의 군사 이만(二萬)과 연합하여 거란(契丹)을 공격하였다.
[신원사]
○ [태조(太祖)] 14년(A.D.1219; 高麗 高宗 6) 봄에 철(瞮)은 대장 조충(趙沖)· 김여(취)려(金汝[취,就]礪)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합진(哈眞) 등과 합세하여 강동성(江東城)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이에 거란(契丹)은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합진(哈眞)이 포리대완(蒲里垈完) 등 10명을 보내어 태조(太祖)의 수조(手詔)를 가지고 강화(講和)를 의논하게 하였다. 철(㬚)은 시어사(侍御史) 박시윤(朴時允)으로 하여금 그들을 맞게 하였는데, 포리대완(蒲里垈完)이 관(館) 밖에 이르러 늦장을 부리며 들어가지 않고 국왕(國王)이 출영할 것을 요청하다가, 역자(譯者)가 여러번 간곡하게 타일러서야 비로소 관(館)에 들었다. 다음날 인견(引見)할 때 포리대완(蒲里垈完)이 전상(殿上)에 올라와서 품속의 글을 끄집어내어 철(㬚)의 손을 잡고 쥐어주니 철(㬚)은 낯빛이 변하였고 좌우에서는 모두 황급해 하며 허둥댔다. 돌아올 때에는 [고려(高麗)로부터] 금(金)·은(銀)그릇, 주포(紬布)· 수달피(水獺皮)를 차등있게 증여받았다. 이 해에 합진(哈眞)이 그의 속관(屬官) 11명을 보내고, 만노(萬奴)도 사신 9명을 고려(高麗)에 보내어 세폐(歲幣)를 독촉하였다.
[고려사]
○원수(元帥) 조충(趙冲)과 병마사 김취려(金就礪)가 몽고·동진(東眞)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거란적을 쳐서 항복받았다. 처음에 합진(哈眞)이 누차 첨병(添兵)을 독촉하였지만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하였는데, 김취려가 말하기를,
“나라의 이해(利害)가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만약 저들의 의사를 어기게 되면 후회한들 어찌 미치겠는가?”
하자, 조충이 말하기를,
“이는 내 뜻과 같다. 그러나 이번 대사(大事)는 거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면 보낼 수 없다.”
하매, 김취려가 말하기를,
“일이 난처할 때 사양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분의(分義)이다. 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청컨대 공(公)을 위해 한번 가겠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고종 6년, 기묘년(己卯年), 1219년 (국역 동국통감, 1996. 11.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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