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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8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야망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6일 갑인 8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당초에 우리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을 갔을 적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우리 나라에 글을 보내어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마(軍馬)를 정돈하여 일본과 더불어 연합해서 곧장 명나라를 침범하자고 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의리를 들어 거절하고 바로 그해 4월에 성절사(聖節使) 김응남(金應南)의 사행(使行) 편에 그 사유을 갖추어 주문(奏聞)하였다. 천자(天子)가 이르기를 ‘조선은 본래부터 공손함을 비치어 우리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니 외침이 있는데 좌시해서야 되겠는가. 요동으로 하여금 즉시 정병(精兵) 2부대를 보내어 응원하게 하고 이어 은 2만 냥을 내어 조선국에 가서 호군(犒軍)하며 대홍(大紅)·저사(.. 2024. 1. 14.
송나라의 대몽항쟁 거점 양양성 송나라나 고려나 대몽항쟁은 천연요새를 이용했다는 점이 같다. 북송은 금나라한테 망했고 남송은 한강을 기점으로해서 양양성이 있는데 그곳은 난공불락 천연요새였다. 양양성이야 말로 송나라의 처음 이자 마지막 요새다. 이곳만 뚫리면 송나라는 끝이다. 그당시 몽골은 수전에 약했고 양양성은 습지라서 기병을 못쓰는데다 이곳을 공략하기 위해서 수륙양병과 투석기가 동원되었다. 남송은 양쯔강으로 막혀있기 때문인지 몽골은 송나라 공략하다 1238년 전군을 유럽쪽으로 돌리고 송나라를 내버려 뒀다. 그러다가 모든 나라들은 다 정벌하고 바로 앞에 있었던 송나라를 몽골은 10만대군을 이끌고 1273년에 마지막에 정벌했다. 그런데 몽골은 다른 나라들 공략하느라 송나라 입장에선 1242년 ~ 1257년 까지 15년간 공백기나 다름 없.. 2023. 11. 26.
윤치호 중국 거리를 거닐다 중국인 과 조선인의 공통점을 뽑자면 둘다 더러운 나라였다. 어느쪽이 더 더럽냐 하면 역시 조선인들이 더 더럽게 살았겠지, 그나마 중국인들은 목욕이라도 하고 살았지 않나 윤치호일기 제1권(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1) > 1887년 > 1월 1일~1월 23일(음력 1886년 12월 8일~12월 30일) 16일(23일, 일, 흐림) 아침에 기침조를 어기다.종이 울려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비록 이르다고는 하나 조목을 어긴 것이다. 10시경에 예배당에 가 설교 듣다. 정오에 끝나다. 점심 든 뒤 고단하여 낮잠 자다. 4시에 일어나 차를 든 뒤 눈을 무릅쓰고 눈 오다. 시내로 가 상점 구경하다. 가옥이나 도로가 다른 지나(支那) 도회지와 다른 점이 없는 것 같다. 하천변의 가옥은 벽돌로 쌓았고 하천의 양편은 돌로 둘러.. 2023. 5. 9.
청나라 황제의 은혜 청나라 황제는 조선을 정복한후 조선왕조를 유지시켜 준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 하라고 말하고 있다. 중원을 정복한 후에는 불쌍한 조선인들을 위해 조공물을 줄여준다. 청나라 황제의 인덕은 바다 보다도 넓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 한국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 2023. 4. 26.
중국인에게 곤장 맞은 조선 장군들 박진 중국인 에게 맞아 죽다 https://iece12345.tistory.com/243 관유격 이라는 중국 장수가 조선장군 4명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 이당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의 노리개 였다. 참고로 박진이라는 조선장군은 누승선 이라는 중국 장수에게 4년후에 맞아죽는다. ​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8일 경오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듣건대 관 유격(毌遊擊)이란 자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朴晉)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까지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 박진 등이 비록 배신(陪臣)이기.. 2023. 3. 25.
박진 중국인 에게 맞아죽다 너무 끔찍한 내용이어서 , 선조수정 실록이나 기타 여러 선비들 문집에서는 기록이 없는데, 간신히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취급이나 당하고 살았는지 알수있다. 선조 88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경립이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 2023. 3. 25.
조선의 중국식 과장법 대한민국 국명의 미스터리 https://iece12345.tistory.com/73 이글의 중국식 과장법을 현재 한국에서 찾아보자면 한국의 국명또한 중국식 과장법이다. 이 조그만 반도땅에 대한 이라는 중국식 국명을 지었으니 말이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1920년(경신년)>4월>24일 《토요일》 흐림. 24일 《토요일》 흐림. 일찍 일어났다. 아침 7시 50분 기차로 송도를 떠나 서울로 왔다. 날은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농부들이 비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송도 집 뒤쪽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 바닥의 바위에 어떤 바보 같은 인간들이 유명한 폭포를 묘사한 한시를 새겨놓았다.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물론 원래의 시는 전형적인 중국식 과장법을 사용한 시다. 하지만 .. 2023. 3. 24.
고려인이 본 원나라 모습 이글은 고려시대 중국 연경[베이징]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 이곡은 고려인으로서 원나라에서 벼슬을 오랫동안했다. ★가정집 [稼亭集]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의 시문집. 가정집 제7권 / 설(說) 시사설(市肆說) 상고(商賈)가 모여서 있고 없는 것을 무역하는 곳을 시사(市肆)라고 한다. 처음에 내가 연경(燕京)에 와서 위항(委巷)에 들어가 보았더니, 예쁘게 치장하고서 간음하라고 가르치는 자가 그 용모의 고운 정도에 따라서 값을 올리고 내리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공공연히 거래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여사(女肆)라고 하는데, 이를 통해서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관부(官府)에 들어가 보았더니, 붓을 함부로 놀려 법규를 농락하는 자가 그 사건의 경중에 따라서 값을 올리고 내.. 2022.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