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도적떼들과 고산리에서 조선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여진족 80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작은 승리였지만 그래도 이긴 전투라고 성종실록에 고산리 라고 치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본문에 붙여놓은 실록글이 가장 자세히 쓰여있다. 이실록글 처음부분 보면 적이 총몇명인지는 모르겠다고 쓰여있다. 마지막 글에는 총 80명 죽였다고 쓰여있다. 여진족과 싸운 이유는 여진족들이 조선을 약탈할려고 온것이다. 그래도 조선중기에는 적만 보면 조선군들은 도망쳤는데 안도망가고 싸운것은 역시 초기라서 그럴까, 솔직히 여진족들이 약탈하러 많이 왔었다. 본문글은 기니간 안읽어도 상관없지만 이긴게 신났는지 기승전결을 제법 자세히 기록했다.
※성종실록 257권, 성종 22년 9월 4일 정축 3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서사명이 고산리에서 전투 상황을 아뢰다
서북면 도원수(西北面都元帥) 이극균(李克均)이 갑사(甲士) 서자명(徐自明)을 보내어 적의 머리 39급(級)을 바치니,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고산리(高山里)에서의 접전(接戰)한 절차(節次)를 서자명에게 자세하게 물어서 서계(書啓)하라."
하니, 서자명이 말하기를,
"지난 8월 21일에 분토 연대 갑사(分土煙臺甲士) 하수영(河水永)이 치보(馳報)하기를, ‘적(賊)의 수효를 기억할 수는 없으나, 황천평(黃川平)으로부터 들어왔다.’ 하였고, 갑사(甲士) 박원산(朴元山)도 또한 치고(馳告)하기를, ‘적(賊)이 자피선(者皮船)을 타고 만포(滿浦)로부터 강을 뒤덮고서 내려온다.’ 하였으며, 이튿날 이른 아침에 첨사(僉使) 강지(姜漬)가 신 등에게 이르기를, ‘적(賊)이 이미 만포(滿浦)를 포위했으니, 즉시 가서 구원(救援)하지 않으면 국가에서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죄를 줄 것이다. 그러니 마땅히 우리 관군(官軍)을 나누어 절반은 성(城)을 지키고 절반은 가서 구원하자.’고 하기에, 신이 저지시키며 말하기를, ‘우리 진(鎭)의 군졸(軍卒)은 고단하고 약하며 이곳과 만포(滿浦)와의 거리는 70여 리(里)입니다. 장수(將帥)가 정예(精銳)한 군졸을 다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고 이약(羸弱)한 군졸만이 성(城)을 지키다가 적(賊)이 만약 만포(滿浦)에서 불리(不利)하여 우리 성(城)으로 옮겨 와서 포위한다면, 우리 군사는 비록 돌아와 구원하려고 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고 하니, 첨사(僉使)와 조방장(助防將) 유호(兪灝)가 신의 계책을 옳게 여기어 군중(軍中)에 경계하기를, ‘너희들은 활을 잘 쏘지 못하니, 만약 적(賊)이 멀리 있는데 대전(大箭)을 쏘면 화살길이 빠르지 못하고 또 맞힐 수도 없어서 도리어 적(賊)의 업신여김만 받게 된다. 너희들은 모두 활집[弓家]을 숨기고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있으면 적(賊)이 반드시 성(城) 아래까지 들이닥칠 것이니, 가히 쏘아서 맞히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3인으로 하여금 1인은 방패를 갖고, 1인은 장창(長槍)을 갖고, 1인은 궁시(弓矢)를 갖게 하되, 각각 활집을 지키면서 적변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진시(辰時) 초각(初刻)에 신 등은 장수(將帥)를 따라서 제승루(制勝樓)에 올라가 서쪽으로 강두(江頭)를 바라보니, 적(賊) 1백여 기(騎)가 강 밖으로부터 말을 달려서 오고 있었는데, 그 뒤를 따르는 무리는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선봉(先鋒) 30여 인(人)이 강변(江邊)에 도착하니, 우리 진(鎭)과의 거리는 2백 보(步) 남짓하였습니다. 혹은 활을 당기고 칼을 뽑았으며, 혹은 몽둥이를 휘두르고 부르짖으며 종횡(縱橫)으로 짓쳐 돌진하기를 도전(挑戰)하는 형상과 같이 하였습니다. 한 적(賊)이 우리 통사(通事)를 두세 차례 부르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오호(惡呼) 오호(惡呼).’ 【오호(惡呼)는 호어(胡語)로 없다고 말함이다.】 하니, 적(賊)이 부르짖기를, ‘너희들을 약탈해 가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적(賊) 백 수십 명이 자피선(者皮船)을 타고 달전연(達田淵)을 건너 분토(分土) 아래 장사천(長蛇川)을 지나 진(陣)을 쳐 성황당(城隍堂) 고개 위에 둔취(屯聚)하였고, 또 2백여 명이 자피선을 타고 물을 따라 내려와 고도암(高都巖) 상단(上端)에서 물을 건너 아울러 성황당 고개 위에 둔취(屯聚)하여 모이니, 사방의 둘레가 70여 보(步)는 될 만 하였습니다.
처음은 대각(大角)을 불고, 다음에 소각(小角)을 부니, 3인이 수은갑(水銀甲)과 수은 두무(水銀兜䥐)를 착용하고 상모(象毛)를 달고는 큰소리를 지르고 손을 휘두르는데, 우러러보면 제적(諸賊)이 수보(數步)를 물러나고, 굽어보면 제적(諸賊)이 수보(數步)를 진군했습니다. 혹을 칼을 빼어 활을 희롱함이 화살끝을 놓는 형상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에 60여 명이 선봉(先鋒)이 되고 3백여 명이 후원(後援)이 되어, 학익진(鶴翼陣)을 만들어 방패를 끼고 길게 몰면서 들어와, 동납포(銅納浦)에 이르러 주둔하였는데, 모두가 보군(步軍)이었고 말을 타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봉(前鋒) 60여 명이 한 사람이 방패를 갖고 아울러 2인을 엄폐하면서 갱참(坑塹)까지 진군하여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대었는데, 화살 쏘기를 빗발치듯 하여 혹은 화살이 성 안의 가사(家舍)에 미치고, 혹은 화살이 성첩(城堞)에 부딪쳤습니다. 갑옷을 입은 한 사람이 몸을 구부리고 성밑에 이르자 두 사람이 사다리를 들고 둘은 따라서 이르렀기에, 신이 성밑의 적(賊)을 쏘았더니 귀 아래를 뚫었으므로 땅에 넘어져 죽었습니다. 적들이 방패를 끼고 갱참(坑塹)의 깊은 속에 들어가 엎드리자 신이 10여 개의 화살을 쏘았는데, 두 사람은 즉시 죽었으나 화살을 맞고 죽지 않은 자는 다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첨사(僉使)도 또한 적(賊) 1인을 쏘아서 죽였고, 남성(南城)의 활집을 지키는 갑사(甲士) 하석지(河石池)·김계후(金繼厚)·박연수(朴延壽)·김귀손(金貴孫)·김효련(金孝連)·임산(林山)·이안석(李安石)도 다투어 화살을 쏘았습니다. 이에 적(賊)이 포위를 풀었는데, 혹은 방패를 지고서 달아나고 혹은 방패로 가리고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유호(兪灝)와 강지(姜漬)가 급히 문을 열도록 하고 군졸(軍卒)을 인솔하였는데 혹은 말을 타고 혹은 걸어서 문을 나서서 갱참(坑塹)에 이르러 보았더니, 세 사람이 쓰러져 죽어 있었으므로 곧 머리를 베었습니다.
적(賊)이 물러가 동납포(銅納浦)를 건너니, 유호 등이 60여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였는데 우리 군인으로 잇따라 이르른 자가 1백여 인이었고, 이석동(李石同)이 보낸 구원군(救援軍) 10명도 잇따라 이르러 추격하여 강변(江邊)에 도착하였더니, 적(賊)이 방패를 끼고 열진(列陣)하고 맞아 싸우면서 그 무리가 도강(渡江)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적(賊)이 반쯤 건넜을 때 아군(我軍)이 급히 공격하니, 적의 형세가 곤궁하여 무너져, 갑옷과 방패를 버리고 다투어 언덕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언덕 위를 점거하여 내려보고 활을 쏘니 적(賊)은 언덕 아래에서 올려 보고서 쏘았는데, 혹 군사 가운데에 화살을 맞은 자가 7명이었으나 상(傷)하지 않았습니다. 적(賊)은 혹 알몸으로 헤엄쳐서 가기도 하였는데, 아군(我軍)이 이를 쏘니, 적은 모두 빠져 죽었고, 혹은 4, 5명이 한 척의 배를 타려고 다투었는데, 뱃전이 물에 빠지자, 우리 군사가 수 많은 화살을 일시에 쏘았습니다. 그런데 혹은 배를 맞히기도 하고 혹은 적(賊)을 맞히자 스스로 서로 요동(搖動)하여 온 배가 뒤집혀 가라앉는데 또한 그 수효를 알 수가 없었으며, 6명만이 화살을 맞아 크게 상하였으나 물을 헤엄쳐서 건너갔습니다. 적으로 화살을 맞아 죽은 자를 모두 언덕 위로 끌어올려 참(斬)하여 적(賊)에게 보이었더니 적들의 곡성(哭聲)이 하늘에 사무쳤고, 혹 말을 아래위로 달리며 부르기를, ‘와거(吪呿) 와거(吪呿).’ 【와거(吪呿)는 호어(胡語)인데, 이는 다 죽었다고 이름이다.】 하였습니다.
어떤 적이 석혈(石穴)에 들어가기에 아군(我軍)이 물가를 따라가면서 쏘려고 하였으나 되지가 않아 신이 장목(長木)을 가지고 끝에 긴 새끼줄을 매달고 새끼줄 끝에 목추(木槌)를 달아 갑사(甲士) 나옥(羅玉)으로 하여금 바위 위에 서서 마구 치게 하니, 마침 적의 머리를 쳤습니다. 적 가운데에서 우리 나라의 말을 아는 자가 활을 분질러 물에 던지고 크게 부르짖기를, ‘내가 처음에 금하였더니 너희가 굳이 나에게 청하여 나로 하여금 처자(妻子)를 볼 수 없게 하고 죽게 하였다.’ 하고, 곧 물가에 넘어졌습니다. 김귀손(金貴孫)이 언덕에 내려가 참(斬)하니, 어떤 적이 머리를 숙이고 손을 모아 울면서, ‘우리 아비를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적 가운데에 우리 나라의 말을 아는 자가 또한 부르짖기를, ‘이미 악인(惡人)을 만났으니, 어찌 다시 살기를 구(求)하겠느냐? 너희들을 반드시 죽여 먹을 것이다.’고 하기에, 신이 편전(片箭)으로 강밖의 말을 탄 적(賊)을 쏘았더니, 곧 땅에 떨어졌고, 갑사(甲士) 전철석(田哲石)이 또 편전(片箭)으로 한 사람을 쏘아 맞히니, 또한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적(賊)은 여러 곳에다 불을 살랐는데, 이것은 반드시 쑥으로써 화살의 상처를 찜질함이었습니다. 화살에 상한 6인을 말에 싣고서 갔으나, 반드시 멀지 아니하여 죽었을 것입니다. 신은 대개 헤아려 보건대 머리를 참(斬)한 자, 익사(溺死) 한 자, 화살에 상하여 죽은 자의 총계(摠計)도 거의 80여 인에 이를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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