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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원각사의 최후

by afsefe 2023. 1. 7.

원각사는 고려시대 사찰인데 원래 이름은 흥복사 였다. 이성계때 조계종 본사가 되었으나 곧이어 세종때 폐사되어 관청으로 삼았다가 세조 10년에 다시 고쳐짓고 원각사라 칭하고 부흥하는듯 하나 연산군때 폐사되어 절을 허물어 버렸다. 현재는 원각사비 가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용재총화 제7권 

원각사(圓覺寺)는 본시 큰 절인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서의 선당(禪堂)이 있을 뿐이었다. 관습도감(慣習都監 세종대왕 때 음악을 맡아보던 곳)은 대전 서선당에 살고, 예장도감(禮葬都監 국장을 맡아보는 곳)은 동선당에 살며, 대전의 북쪽에 있는 중부에는 유생들이 모여 살았다. 그런데 세조께서 하명하시어 모두 헐어 없애고 다시 큰 절을 지으시고 원각이라 이름하여, 은천군(銀川君)ㆍ옥산군(玉山君)으로 제조를 삼고, 대사헌을 겸하게 하여 항상 길 위에서 헌관의 의(儀)를 쓰니, 이로써 두 사람이 가벽(呵辟)하고 또 기사(騎士)로 하여금 퉁소를 불고 앞을 인도케 하니 남녀가 많이 모여 구경하였다. 

(가벽呵辟 - 물러나라고 소리를 지름)

 

※임하필기 제19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원각사(圓覺寺) 

광묘(光廟 세조(世祖))가 서울에 원각사를 창건하고 서 있는 불상을 만들었다. 왜의 사신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무릇 불상은 모두 앉아 있는데, 이 불상은 서 있다. 이는 지나가는 형상이니, 이 절이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연산군(燕山君) 때 이 절을 허물고 이 불상을 밖으로 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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