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3대 패전은 - 쌍령의 전투 , 북문의 전투 , 험천의 전투
정세규는 무신이 아니고 문신 이었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7일 정유 4번째기사 /
공청 감사 정세규가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전군이 패몰하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연려실기술 제26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䂓)는 병사 이의배(李義培)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알고, 날랜 군사를 뽑아서 몸을 떨쳐 홀로 나가 곧장 헌릉(獻陵)에 이르려 하였으나, 적병에게 막혀 험천(險川)에서 진을 쳤다. 적이 높은 산봉우리에서부터 내리 공격하므로 한참 동안 싸우다가 전군이 패배하여 이성 현감(尼城縣監) 김홍익(金弘翼),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경(李慶)징선(徵善),금정 찰방(金井察訪) 이재(李載)상시(尙時) 가 모두 죽고, 세규는 바위 아래에 떨어졌는데, 그때는 이미 밤이 캄캄해 청병(淸兵)이 좌우로 달려들어 충돌하여 알지 못하였다. 한 군졸이 몰래 세규를 업고 도주하여 탈출하였다. 세규는 본래 서생(書生)으로서 군사 일에 익숙하지 못한데, 외롭고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한창 기세가 장대(張大)한 적에게 항거하여 가장 먼저 국난(國難)에 달려가 이리저리 옮기며 싸워 마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필사(必死)의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난리잡기(亂離雜記)》
※국조보감 제48권 / 숙종조 8
14년(무진, 1688)
○ 영부사 김수홍 등이 상에게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에 여러 도의 군사로서 근왕(勤王)하다가 쌍령(雙嶺)에서 전사한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들 또한 제사를 지내야 됩니다.”
하고, 정언 김홍복(金洪福)이 아뢰기를,
“험천(險川)의 전투에서 죽은 사졸이 쌍령의 전투보다 적지 않고, 북문(北門)의 전투에서도 날랜 장졸들 태반이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늙은이들의 입으로 전해지면서 비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은전을 의당 똑같이 베풀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다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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