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의 전투 , 부차전투 , 사르후 전투 - 명나라와 후금과의 싸움에서 조선이 파병나가 싸운 전투다.
한국 국사학계에서는 이걸 중립외교로 그럴듯 하게 포장하는데 실제로는 1만3천명의 조선군에서 8천명이 전사하고 5천명이 포로로 붙잡힌 대패한 전투다. 광해군이 적당히 살펴서 이기는 쪽에붙으라는 밀지를 줬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오는데 그건 인조반정후 정당화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다. 실제로 전투내용을 봐도 개터지듯 싸우다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내용밖에 안나온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12일 을미 1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평안 감사가 중국군과 조선군이 심하에서 패배했다고 치계하다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三河)에서 크게 패전하였습니다. 이 때 유격 교일기(喬一琦)가 군사들을 거느리고 선두에서 행군하였고, 도독이 중간에 있었으며 뒤이어 우리 나라 좌·우영이 전진하였고, 원수는 중영(中營)을 거느리고 뒤에 있었습니다. 적은 패한 개철(開鐵)·무순(撫順) 두 방면의 군대를 회군(回軍)하여 동쪽으로 나와 산골짜기에 군사를 잠복시켜 두고 있었는데, 교 유격이 〈앞장서 가다가〉 갑자기 【부거(富車) 지방에서 노추(奴酋)의 복병을】 만나 전군이 패하고 혼자만 겨우 살아났습니다. 도독이 선봉 군대가 불리한 것을 보고 군사들을 독촉하고 전진해 다가갔으나, 적의 대군이 갑자기 이르러 산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철기(鐵騎)가 마구 돌격해 와서 그 기세를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구 깔아 뭉개고 죽여대는 바람에 전군이 다 죽었고, 도독 이하 장관들은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 자살하였습니다. 우리 나라 좌영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뒤를 이어 전진하여 들판에 포진하고 말을 막는 나무를 설치하였으나 군사는 겨우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적이 승세를 타고 육박해 오자 응하는 화포를 일제히 쏘도록 명했는데, 적의 기병 중에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재차 진격하였다가 재차 후퇴하는 순간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어닥쳐 먼지와 모래로 천지가 캄캄해졌고,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서 화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적이 철기로 짓밟아대는 바람에 좌영의 군대가 마침내 패하여 거의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응하는 혼자서 큰 나무에 의지하여 큰 활 3개를 번갈아 쏘았는데, 시위를 당기는 족족 명중시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적은 감히 다가갈 수가 없자 뒤쪽에서 찔렀는데, 철창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는 잡은 활을 놓지 않아 오랑캐조차도 감탄하고 애석해 하면서 ‘만약 이같은 자가 두어 명만 있었다면 실로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하고는, ‘의류 장군(依柳將軍)’ 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영의 군대는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모두 섬멸되었고, 원수는 중영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험준한 곳에 의거했으나, 형세가 고립되고 약한데다가 병졸들은 이틀 동안이나 먹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우리 나라의 오랑캐말 역관인 하서국(河瑞國)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경서(金景瑞)가 먼저 오랑캐 진영으로 가서 약속을 하고 돌아왔는데 또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와서 맹세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중국의 패잔병 수백 명이 언덕에다 진을 치고 있었는데, 적이 우리 군대에다 대고 ‘너희 진영에 있는 중국인을 모두 내보내라.’고 소리치고, 또 ‘중국 진영에 있는 조선인을 모두 돌려보내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때 교 유격이 아군에게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우리 나라가 오랑캐와 강화를 맺으려는 것을 보고는 즉시 태도가 달라져 작은 쪽지에다 글을 써서 자신의 가정(家丁)에게 주면서 요동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하라고 하고는 즉시 활시위로 목을 매었는데, 우리 나라의 장수가 구해내자 낭떠러지로 몸을 던져 죽고 말았습니다. 홍립 등이 중국 군사를 다 찾아내어 오랑캐 진영으로 보내자 적은 그들을 마구 때려서 죽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홍립은 편복(便服) 차림으로, 경서는 투구와 갑옷을 벗어 〈오랑캐 깃발 아래에 세워 두고〉 오랑캐 진영으로 갔는데, 적은 홍립과 경서로 하여금 삼군(三軍)을 타일러 갑옷을 벗고 와서 항복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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