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10(한국사료총서 번역서10)>1943년(계미년)>4월
26일《월요일》 맑고 따뜻함.
서울 집. 화창한 날이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취운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아내가 영면에 들었으니 지난 39년 동안 우리가 티격태격했던 사소한 갈등들도 모두 그녀의 소중한 유해와 함께 영원히 땅에 묻혔다. 하지만 그녀의 사랑스러운 특징들은 여전히 내 마음과 감정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1905년 꽃다운 열여섯의 나이로 매려가 나에게 왔을 때 어찌나 예쁘던지, 하디여사도 자기가 본 조선 처녀들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말했었다. 매려는 근 40년 간 폭풍 같았던 내 삶의 우여곡절을 나와 함께 겪으며, 그 사이에 다섯 딸과 세 아들을 낳아주었다. 죽기 전 몇 달 동안 그녀가 로라와 자기 소생의 딸들에게 애정 어린 간호를 받고, 모든 자식들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은 영혼들의 세계로 고이 들어간 걸 생각하면 큰 위로가 된다.
매려는 멋지게 살림을 잘 하는 능률적인 주부였다. 바느질과 요리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꽃에 대한 열정은 그녀가 지닌 아름다운 특징 중 하나다. 어떤 식물이든지간에 그녀가 정성을 쏟아 돌봐주면 사랑스럽게 꽃을 피웠다. 그 솜씨가 얼마나 대단한지 가끔씩 나는 그녀가 지팡이를 땅에 심고 거름을 주면 지팡이에서도 꽃이 필 거라고 생각했었다.
매려는 의지가 강하고 상식이 풍부했다. 다만 가장 안타까운 건 도무지 뭘 읽거나 공부하기를 싫어했다는 점이다. 근대교육을 잘 받았더라면 조선 여성들 가운데 지도자로 무난히 우뚝 설 수 있었으련만.
그녀의 몸뚱이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만 빼면 나는 그녀가 죽었다는 게 도통 믿겨지지 않는다. 아직도 순수한 애정으로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믿고 싶다. 이 믿음으로 하루하루 위로를 얻으련다. 손대는 것마다 지옥으로 변모시키는 히틀러도, 스탈린도, 맑스도, 그리고 그들을 모방하는 자들도 없는 영원한 평화의 세계에서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과 조우할 때까지 말이다.
註 001 로라(Laura)는 윤치호가 마애방에게서 낳은 윤봉희로, 백매려에게는 전처소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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