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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

홍타이지의 조공품목

by afsefe 2024. 1. 7.

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명나라와 청나라 에 조공바치며 중립외교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태종 홍타이지는 무리한 조공과 요구를 하며 조선을 압박한다. 애초에 중립외교 따위론 병자호란을 막을수 없다. 홍타이지는 막대한 조공 이유로 광해군 당시의 사르후 전투를 이유로 들고있다. 이 막대한 조공품목은 광해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사르후 전투때는 명나라를 도왔으니 이번에는 자신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또한 가도를 정벌하게 배도 달라고 하고있다. 맨밑에 조공품목이 쓰여있는데 상상을 초월한다. 100% 병자호란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병자호란 일어난 것도 광해군 때문인거다.

 

※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1월 25일 정사 1번째기사 1633년 명 숭정(崇禎) 6년   

심양으로 간 사신 신득연이 예물은 전하지 못하고 호서만 받아가지고 오다

심양(瀋陽)으로 회답(回答)하러 간 사신 신득연(申得淵)이 예물(禮物)을 전하지 못하고 호서(胡書)만 받아가지고 돌아와 치계하기를,

"소호(所胡) 등이 날마다 와 힐책하면서 군대를 지원하라, 배를 빌려 달라, 사신을 끊으라는 등 모욕하는 말이 갈수록 극심하였고 또 예물이 그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 하여 끝내 받아주지 않기에 삼가 하나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답한 국서(國書) 및 무역의 시장을 여는 데 대한 조약 문서와 새로 정한 물품의 건수를 모두 등서하여 보냅니다."

하니, 상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 신득연이 사명을 욕되게 하여 가지고 간 예물도 퇴각을 맞아 돌아와서는 하나도 손상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왔다면서 도리어 자긍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그 답서에 이르기를,

"내가 이번에 물건 수를 많이 정한 것은 탐하는 마음에서가 아니오. 다만 정성과 믿음으로 우호를 돈독히 하려는 것이었는데 정의가 점점 쇠하여 이익을 탐한다고 기만하니 실로 내 마음과는 다르오. 귀국이 명(明)나라에 바치는 것은 몹시 번다하고, 사신이 왕래할 때 기만과 탐색을 한없이 한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이것은 달게 받아들이면서 유독 우리 나라에 주는 사소한 물건에는 원망을 하오. 더구나 귀국이 준 물건은 본래 정으로 준 것이 아니며 또 우리가 요구한 것도 아니오. 이는 귀국이 까닭없이 명나라를 도와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기에 하늘이 벌을 내려 준 것이니, 우리가 그 숫자를 정한 것이 실로 이 때문이오. 1년에 두 차례가 불가능하다면 한 차례로 하는 것도 좋겠으나 다만 예단과 교환하는 물건이 점점 적어지고 질이 나빠 심히 간과할 수 없었소. 만약에 우리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서로 왕래를 끊고 물건만 무역하는 것이 좋겠소.

또 앞서 소란이 있었던 것은 모두 귀국이 스스로 싸움의 단서를 야기하였기 때문이었소. 우리 나라의 도망한 백성들을 숨겨 두었다가 모문룡(毛文龍)에게 넘겨 주기에 나는 그것을 참을 수 없어서 정벌한 것이오. 귀국이 금은과 비단은 토산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남조와 끊임없이 무역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소. 귀국의 토산이 아니더라도 남조에 어찌 그 물품이 없겠소이까. 그전에는 남조를 도와 우리를 침략하였으니 지금 또한 우리를 도와 남조를 공격해야 할 것이오. 또 앞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숨겼으니, 내가 지금 섬을 정벌하려 하니 또한 나에게 큰 배 3백여 척을 의주(義州)의 포구로 내다 빌려 주어야 할 것이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귀국의 마음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오. 병선과 예물 이 두 건을 만약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신을 다시금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만약 정한 수대로 따라 준다면 서로 왕래하게 하되, 사신으로 하여금 남조의 사신처럼 기만과 강탈을 하지 못하게 하겠소.

또 정묘년에 맹약한 뒤 일가의 아우를 친아우로 거짓 칭하였고, 우리가 송환한 관원을 죽이고도 저절로 죽었다 하였고, 그곳에서 돌려 보내야 할 관원도 다시 들여보내지 않는 등 우리를 기만한 일이 이와 같이 많기 때문에 내가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오. 왕은 이를 생각하여 모든 일을 속히 정하여 돌려보내 두 나라로 하여금 함께 태평을 누리게 한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소이까."

하고, 무역 시장을 여는 조약의 문서에는,

"금년 봄에 대시(大市)를 열게 되면 3월 1일 의주(義州)에서 무역을 해야 할 것이오. 그때 작년 가을의 대시에서 무역하지 못한 것을 무역해야 할 것이니, 왕은 어기지 마시오."

하였다. 【 새로 정한 수는 금(金) 1백 냥, 은(銀) 1천 냥, 잡색 면주(雜色綿紬) 1천 필, 백저포(白苧布)·세마포(細麻布) 각 1천 필, 잡색 세면포(雜色細綿布) 1만필, 표피(豹皮) 1백 장, 수달피(水獺皮) 4백 장, 궁각(弓角) 1백 부, 단목(丹木) 1백 근, 상화지(霜華紙) 2천 권, 잡색 채화문석(雜色彩花文席) 1백 장, 세룡석(細龍席) 1백 장, 호초(胡椒) 10두, 청서피(靑黍皮) 2백 장, 부도(副刀)·소도(小刀) 각 20병, 송라다(松羅茶) 2백 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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