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몽골전쟁 강화천도 당시를 보여준다. 여러 정보를 알수있다. 고려시대는 현재처럼 삼일장 이었다는거, 참고로 조선은 유교때문에 퇴보해서 삼년상이다. 최우가 준 장혜왕후의 관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북한에서 발굴하면 볼수 있지않을까, 최우 무신정권 당시 귀족들이 살던 개경은 대단히 잘살았다. 김세충은 고려의 문신이다. 강화천도를 반대했다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한게 화근이 되어 최우에게 죽었다.
※국역 동국통감
고려 고종 19년, 임진년(壬辰年), 1232년
여름 6월
○초하루 경술일(庚戌日)에 왕비 왕씨(王氏)가 훙(薨)하였는데, 백관이 현관(玄冠)과 소복(素服) 차림을 3일 동안 하였다.
○신유일(辛酉日)에 왕후(王后)를 장사지내고, 시호(諡號)를 장혜(莊惠)라 하였다. 최우가 관곽(棺槨)을 바쳤는데, 모두 금·은(金銀)으로 장식하여 대단히 사치스럽고 아름다웠으므로, 왕이 보고서 탄복하며 칭찬하였다.
○최우가 왕을 위협하여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였으며,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冲)을 죽였다. 최우가 천도하려고 그의 집에 재추(宰樞)를 모아 의논하였는데, 이때는 나라가 태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서울에는 금벽(金碧)으로 단청(丹靑)한 집들이 즐비하였으며, 인정(人情)이 그 땅에 편히 살아서 옮기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겼으나, 최우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유승단(兪升旦)이 말하기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이치이다. 예의로 섬기고 믿음으로 사귄다면, 저들 또한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괴롭히겠는가? 성곽(城郭)과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다 버리고 해도(海島)에 도망가 숨어서 구차하게 세월만 미루어 가며, 변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장정들은 창과 화살에 맞아 죽게 두고 노약자들은 노예나 포로로 끌려가도록 하는 것은 나라의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김세충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최우에게 힐문하기를,
“송경(松京)은 태조(太祖) 이래로부터 역대(歷代)로 지켜 온 지 무릇 3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니, 진실로 마땅히 힘을 합하여 사직을 사수(死守)해야 할 것인데, 이곳을 버려 두고 장차 어디에 도읍을 정하겠습니까?”
하므로, 최우가 성을 지킬 방책을 물으매, 김세충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어사 대부(御史大夫) 대집성(大集成)이 최우에게 이르기를,
“김세충이 아녀자(兒女子)의 말을 본받아 감히 대의(大議)를 저지하려 하니, 청컨대 목을 베어서 중외(中外)에 보이도록 하소서.”
하고, 응양군 상호군(鷹揚軍上護軍) 김현보(金鉉寶)가 대집성의 뜻에 맞추어서 또한 그렇게 말하니, 드디어 김세충을 끌어내어 죽였다. 이날 최우가 임금에게 주청(奏請)하여, 속히 대전(大殿)에서 내려와 강화로 옮기자고 하였으나 왕이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였는데, 최우가 녹전거(祿轉車) 1백여 량(輛)을 빼앗아서 가재(家財)를 강화로 수송하니, 서울이 흉흉(洶洶)하였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날짜를 정하여 5부(五部)의 인호(人戶)를 발송(發送)토록 하고, 이어서 성안에 방(榜)을 붙여 널리 보이기를,
“미루어 가면서 기일이 닥쳐도 길을 떠나지 않는 자는 군법(軍法)으로 논한다.”
하고, 또 사자(使者)를 여러 도(道)에 나눠 보내어 백성을 산성(山城)과 해도(海島)에 옮기게 하였다.
○최우가 2령(二領)의 군사를 내어 비로소 강화에 궁궐을 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고종 19년, 임진년(壬辰年), 1232년 (국역 동국통감, 1996. 11.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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