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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송나라 서긍이 본 고려시대 사찰

by afsefe 2022. 12. 17.

서긍이 본 고려시대 사찰들은 지금은 없다. 조선 건국 초기 전부 폐사 시켜버렸다. 선비들의 공격을 맞고 사라진 사찰이 상당히 많다. 지금 사찰의 문제점이 뭔가 그것은 조경과 쉼터이다. 고려때 까지 사찰에는 정자와 정원이 있어서 아름답게 꾸며놓았는데 지금은 없다. 서긍이 구경하고 놀다갈수 있었던것이 여기에 있는것이다.

1. 안화사 - 조선 건국과 함께 폐사

1930년 일제시대에 복원되기 시작하여 현대 까지 개건되었다.

北, 독일과 협력으로 개성 안화사 개건보수 완료통일뉴스 2015.07.16.

고려시대 시화집인 '파한집'에 따르면, 안화사가 고려 말까지 건물의 웅장함과 단청의 화려함에 있어서 전국적으로 으뜸이었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사우(祠宇) 정국안화사(靖國安和寺)

안화사는 왕부의 동쪽에서 산길을 3~4리 가면 점차로 수풀이 깨끗하고 우거진 산록이 험악한 것이 보인다.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는 옥륜사(玉輪寺)에서 수십 보를 지나가면 작은 길이 구불구불 얽혀 있고 높은 소나무가 길을 끼고 있는데, 삼엄하기가 만 자루의 미늘창을 세워놓은 듯하다. 맑은 물이 여울져 튀어오르며 놀란 듯 달려가 돌을 씻어내는 것이, 쇠를 울리고 옥을 부수는 것 같다. 시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고 건너쪽 강언덕에 세운 두 개의 정자가 여울 돌무더기에 반쯤 잠겨 있는데, 청헌정(淸軒亭)ㆍ연의정(漣漪亭)이 그것들로 서로간의 거리는 수백 보가 된다. 다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산문각(山門閣)주1]을 지나 시냇물을 끼고 몇 리를 가 안화문(安和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정국안화사로 들어간다. 절의 액자는 곧 지금의 태사(太師)채경(蔡京)의 글씨이다. 문의 서쪽에 정자가 있는데 방(榜)이 ‘냉천(冷泉)’으로 되어 있다. 또 좀 북쪽으로 가면 자취문(紫翠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는 신호문(神護門)으로 들어간다. 문 동쪽 월랑에 상(像)이 있는데 그것은 제석(帝釋)주2]이다.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香積)’이라 하며, 가운데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두 누각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양화(陽和)’라 하고 서쪽의 것을 ‘중화(重華)’라 한다. 여기서부터 뒤에는 세 문이 늘어서 있는데, 동쪽 것을 ‘신한(神翰)’이라 하며, 그 뒤에 전각이 있는데 ‘능인(能仁)’이라고 한다. 전각의 두 액자는 실로 금상 황제께서 내린 어서(御書)이다. 중문은 ‘선법(善法)’이라 하는데 그 뒤에 선법당(善法堂)이 있고, 서문은 ‘효사(孝思)’라 한다. 뜰 뒤에 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미타당(彌陀堂)’이라고 한다. 전각 사이에 두 곁채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관음(觀音)을 봉안하였고 또 하나에는 약사(藥師)를 봉안하였다. 동쪽 월랑에는 조사상(祖師像)이 그려져 있고 서쪽 월랑에는 지장왕(地藏王)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승도(僧徒)의 거실이다.

그 서쪽에 재궁(齋宮)이 있는데, 왕이 그 절에 오면 심방문(尋芳門)으로 해서 그 자리[位]로 간다. 앞문은 ‘응상(凝祥)’, 북문은 ‘향복(嚮福)’이며, 가운데는 인수전(仁壽殿)이고 뒤는 제운각(齊雲閣)이다. 샘이 산 중턱에서 나오는데 달고 깨끗하여 사랑스럽다.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방(榜)이 역시 안화천(安和泉)이다. 화훼(花卉)ㆍ죽목(竹木)ㆍ괴석(怪石)을 심어서 놀고 쉬는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흙과 나무, 꾸민 모양이 은근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워 병풍 속에 있는 듯하다. 고려인들은 규장(奎章 천자의 글을 말함)과 예조(睿藻 왕의 글을 말함)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가서 삼절(三節)의 관속과 종리(從吏)를 거느리고 어서전(御書殿) 아래에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여[飯僧] 복을 빌고 날이 저물어서 관사로 돌아가니, 실로 선화(宣和) 5년(1123) 7월 2일 계축이었다.

1]산문각(山門閣) : 상층이 누각으로 된 산문. 산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최초의 문을 말한다

2]제석(帝釋) : 불가의 설화에 나오는 도리천(忉利天)의 주재자로,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선견성(善見城)에 살면서 불법을 옹호하고 아수라(阿修羅)를 몰아 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범명(梵名)은 석가제환인다라임.

2. 보제사 - 충숙왕 때 연복사로 개칭한듯 하나 조선때 사라졌다.

신효사와 함께 마을안에 있던 사찰. 왕궁만큼이나 웅장하고 화려했다. 조선건국초기 마을안에 있던 사찰들을 일차적으로 철거한거 같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사우(祠宇)

광통보제사(廣通普濟寺)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에 남향으로 걸려 있고, 중문의 방은 ‘신통지문(神通之門)’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ㆍ문수(文殊)ㆍ보현(普賢) 세 상이 놓여 있고,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果蔌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3. 흥국사 - 언제 사라진지 모르나 조선때 사라졌을듯 하다.

개성시 만월동 에 있던 사찰, 이 절 또한 마을안에 있었다. 현재 한국에선 사찰은 산속에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듯하나, 이당시엔 일본처럼 마을안에 사찰이 많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사우(祠宇)

흥국사(興國寺)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가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놓았다. 대문은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銅)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당간)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송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 있다. 그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의 총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4. 국청사 - 몽골침략때 불탔으나 충숙왕때 중수했으나 조선때 사라졌다.

천태종 “北 국청사 복원 계획” - 불교는…불교신문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7권 사우(祠宇)

국청사(國淸寺)

국청사는 서교정(西郊亭) 서쪽 3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긴 낭하와 넓은 곁채에 높은 소나무와 괴석이 서로서로 비치며 둘러 있어 경치가 맑고 수려하다. 곁에 석관음(石觀音)이 벼랑 밑에 높이 서 있다. 지난번 사절이 지날 때 국청사의 문을 통과하게 되자 그곳 갈의(褐衣) 차림의 승도(僧徒) 1백여 명이 떼지어 나와 구경을 하였다.

1]서교정-고려 시대 서쪽 교외에 세웠던 정자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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