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
선화봉사 고려도경 제22권
잡속(雜俗) 1
왕제(王制)에 넓은 들과 큰 내[大川]로도 제도(制度)를 달리하고, 백성이 그 사이에 생활하여 풍속을 달리한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넓은 들과 큰 내는 애초부터 반드시 먼 지방이나 절원한 지역이 아닐 것이다. 특히 중국의 땅이라도, 내[川]의 풍속이 혹 다르면, 습속이 각기 달라서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만이(蠻夷)의 한계가 바다 밖에 있으니, 그 풍속이 한 가지일 수 있겠는가?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文物)과 예의(禮義)를 갖춘 나라라 일컫고 있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실제로는 궁벽한 곳이어서 풍속이 박잡하여 오랑캐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했다.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예(禮)에 말미암은 것이 적고, 남자의 건책(巾幘)은 조금 당제(唐制)를 본받고 있으나 부인의 땋은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은 아직 완연히 좌수(髽首) 변발(辮髮)의 모습이 있고, 귀인이나 선비 집안에서는 혼가(婚嫁)에 대략 빙폐(聘幣)를 쓰나 백성에 이르러서는 다만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 또 부가(富家)에서는 아내를 3~4인이나 맞이하되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하고, 아들을 낳으면 딴 방에 거처하고, 병을 앓을 때는 비록 가까운 가족이라도 약을 들이지 않으며, 죽어 염(殮)할 때 관에 넣지 않는다. 비록 왕이나 귀족에 있어서도 그러니,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기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 두어 봉분도 만들지 않고 나무도 심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 다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부도(浮圖 부처)를 좋아하며, 종묘(宗廟)의 사당에도 중을 참여시켜 범패(梵唄)를 하나 그 말이 통하지 않는다. 욕심이 많고 회뢰(賄賂)[뇌물]가 성행하며, 길을 다닐제 달리기를 좋아하고 섰을 적에는 허리 뒤에 손을 얹는 자가 많으며, 부인이나 승니(僧尼)가 다 남자의 절을 하니, 이런 것들은 가히 해괴(駭怪)한 것들이다. 자질구레한 것의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을 들려면 한두 가지가 아니로되, 지금 잠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아울러 토산(土産)과 자양(資養)의 물건을 아래에 붙인다.
[주D-001]관혼상제(冠婚喪祭) : 관례와 혼례와 상례와 제례를 말한다. 이 제도가 완전히 시행된 것은 조선 태종 때,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신칙(申飭)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주D-002]솔개가……놓아두되 : 이는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내세우는 불교의 영혼관에서 말미암은 일종의 장례법으로, 일본에서도 1세기 전에는 개천에 시신을 유기하고 신주만 모셔다가 절에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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