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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시대

정유재란 - 남해안으로 퇴각하는 왜군

by afsefe 2024. 1. 21.

왜군은 14일에 명군에 의해 조선정벌이 어려워 지자 남해안 으로 퇴각한다. 15일에는 비변사 에서 왜적이 퇴각하는 이유에 대해서 의논한다. 9월말경 가토는 울산 , 시마즈 는 사천 ,  전주를 점령하고 있던 고니시는 남하 하는 왜군과 같이 순천으로 남하 하여 왜성을 축성 한다. 왜군의 남해안 으로 남하한걸 이순신 에게 공을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아니다. 명량해전은 16일이다. 애초에 명량해전 같은 작은해전으로 왜 퇴각하겠냐, 고작 판옥선 12척이 뭐가 무서워서, 마지막 선조의 말만 봐도 요사이 왜군을 물리친 것은 모두 직산전투의 영웅 양경리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조명연합군 은 서울을 탄탄히 방어하고 있어 직산전투에서도 이기기 어려운 명군과 싸우기 어려운데 모험을 걸기보다는 방어전이 유리한 관계로 남해안 으로 내려가 방어전을 펼친것이다.

 

※ 선조 92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9월 15일(임인) 4번째기사
왜군이 철수하는 까닭에 관해 비변사 당상들과 논의하다

밤 4경에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갔는데, 비변사 당상(備邊司堂上) 홍진(洪進), 좌승지 우준민(禹俊民), 우승지 김신원(金信元), 동부승지 최천건(崔天健), 가주서(假注書) 권진(權縉)·심즙(沈諿), 검열(檢閱) 정홍익(鄭弘翼)·이필영(李必榮)이 입시(入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 초기(草記)를 발락(發落)하기도 전에 여러 당상들이 다 흩어져 가버린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금이 어떤 때인가? 대신(大臣)에게 밀부(密符)를 보내 밤중에 부르면 의당 뭔가 급박하고 긴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쏜살같이 달려와야 하는데 좌상(左相)은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서 오지 않았으니, 정말 병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중국 장수가 뜻밖에 이런 조치를 하였는데, 지나친 염려라고 할지 모르지만 정예병을 다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간 뒤에 흉적이 그 뒤로 돌아나와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는다면 일이 예측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흉적이 무슨 까닭으로 갑자기 철수하여 물러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장수가 흉계에 빠져들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하니, 준민이 아뢰기를,
“알 수 없습니다. 중국 장수가 우리 나라에서 군기(軍機)를 누설할까 염려하여 모든 일을 완전히 비밀에 붙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의 여러 재신(宰臣)들은 어떻게들 의논하였는가? 나는 그 사이의 곡절을 모르니 의혹이 없을 수 없다. 왜적이 물러가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별로 두려워할 것도 없는데 이와 같이 하니 흉모를 추측할 수가 없다. 중국 장수는 반드시 적실하게 적정(賊情)을 듣고 나서 이런 조치를 한 것인가?”
하니, 홍진이 아뢰기를,
“어제 저녁 비변사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 왜적이 안성(安城)을 경유하여 곧장 여주(驪州)로 향해서 상류로 돌아나오려는 것이 아닌가?’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김수(金睟)는 말하기를 ‘왜적은 필시 충주(忠州)의 길을 택하여 영남(嶺南)으로 철수해 돌아갈 것이다. 중국 장수가 상세히 정탐한 뒤이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으니 의심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였고, 유성룡(柳成龍)은 역시 말하기를 ‘왜적이 바로 쳐들어 올 수 있는 세력을 갖고 있는데 무엇을 꺼려 이렇게 군사를 몰래 움직여 돌아나오는 계책을 세우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뜻은 알 수 없다.”
하니, 홍진이 아뢰기를,
“흉적의 변사(變詐)를 예측할 수 없고 용병(用兵)하는 것도 신묘하니 철수한다는 말 역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국 장수가 지금 추격하려고 하니 그의 하는 바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상도 김수의 말과 같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지나치게 의심하는지 모르지만 저 왜적이 거짓으로 패전하여 물러가는 체하면서 중국 병사를 유인하여 형세가 나눠지고 힘이 약하게 만든 뒤에 돌아나올 계책을 세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였다. 홍진이 아뢰기를,
“김수에게 들으니, 중국 장수 역시 그런 염려를 하여 이미 한 부대의 병력을 용인(龍仁)과 죽산(竹山) 등처로 보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를 뽑는 일에 대해서는 극히 정예병을 가려 경리(經理)의 질책을 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리가 처음 왔을 때엔 접반사(接伴使)의 서장(書狀)만 보고도 매사에 화를 낸다고 하기에 대단히 의심스럽고 두려웠었는데, 서울에 온 뒤로는 나를 매우 공손하게 대하고 심기(心氣)를 평이하게 가져 별로 화내거나 힐책하는 경우가 없으니, 필시 사세(事勢)가 그렇지 아니한 줄을 자세히 알아 그럴 것이다.”
하자, 홍진이 아뢰기를,
“경리가 김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평양(平壤)에 있을 적엔 그대 나라가 모든 일을 조치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여겼는데, 지금 와서 보건대 아무리 힘을 다하고자 하여도 형세가 그렇게 만들고 있으니, 부디 힘써 조치하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제장(諸將)들이 물러나 돌아가려 하지 않고 나아가 싸워 수급(首級)을 바치게 된 공은, 다 경리가 이곳에 왔기 때문이니 그 공이 적지 않습니다. 전일에 강가에 갈 적에 제독(提督) 역시 그의 뜻을 몰랐었는데, 이는 대체로 단기(單騎)로 대중에 앞장서 장사(將士)들을 격려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수급을 베게 된 것은 모두 경리의 힘이었다. 군량을 준비하고 병마(兵馬)를 뽑아 보내는 일을 서둘러 시행하여 그의 뜻을 거슬려 뜻밖의 일을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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