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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무신 황상

by afsefe 2022. 12. 22.

황상은 고려사람이지만 원나라 관직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당시 고려사람들이 원나라에서 출세하여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황상의 업적은 기철을 죽인 업적과 홍건적을 물리친 업적, 왜구를 물리친 업적이 있다. 고려사에는 홍건적 물리칠때 이성계 활약만 써놓고 말았는데 실제로는 안우 , 김득배 , 최영, 황상 , 최고 지휘관 정세운 등 업적이 있다. 

 

황상(?~?) : 황상은 부친 황석기(黃石奇)가 고위 관직을 역임하고 공민왕대 평장사에 까지 오른 점으로 보아 가문의 배경이 결코 미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매형의 힘으로 원나라 조정에 입사(入仕)하여 순제(順帝)의 총애를 받은 것을 보면 그의 출세가 원 조정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황상이 24세의 젊은 나이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되고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원나라에 체류하던 기간 공민왕과 그의 측근들과의 교류가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민현구, 「고려 공민왕대의 주기철공신에 대한 검토」 『이기백선생고희기념논총』, 1994, 912~914쪽. [네이버 지식백과] 황상 [黃裳]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국역 고려사 : 열전

황상 [ 黃裳 ]

황상(黃裳)1)은 의창현(義昌縣 :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사람으로 그 부친 황석기(黃石奇)는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졌다. 황상은 충혜왕 때 호군(護軍)벼슬을 받았다. 공민왕 초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추충익찬공신(推忠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하였다.

왕이 한번은 양부(兩府)를 불러, “듣자하니 경들은 다들 매와 개를 기른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하고 묻자, 시중 염제신(廉悌臣)은,

“저는 본디 좋아하지도 않고 게다가 아직까지 양부에서 그것을 기른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왕이 노하여,

“지금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 백성들 살기가 어려운데, 경들은 어찌 나라를 근심하지 않고 개와 매를 풀어서 곡식을 짓밟는가?”

라고 꾸짖었다. 황상과 경천흥·원의(元顗)가 모두 매와 개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그 후 황상은 다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로 옮겼고, 기철(奇轍)을 죽인 공로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어사대(御史臺)에서, 그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신귀(辛貴)의 처 강씨(康氏)와 간통을 저질러 풍속을 문란하게 하였으니 국문하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왕은 황상의 용맹함을 아꼈고 또 공이 있다는 이유로 그냥 면직만 시켰다.

왕이 홍건적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 황상이 호종해 교주·강릉도 도만호(交州江陵道都萬戶)가 되었다. 안우(安祐)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한 후 호종(扈從)과 수복의 공로로 모두 일등공신이 되었고, 참지문하정사(參知門下政事)로 임명되었으며, 추충분의익찬공신(推忠奮義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이어서 찬성사(贊成事)로 승진했으나 파직되고, 회성부원군(檜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원나라에서는 그가 홍건적을 평정한 공을 기려 봉훈대부·경정감승(奉訓大夫經正監丞)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다시 찬성사가 되었고, 추충분의보리익찬공신(推忠奮義輔理翊贊功臣)의 호가 더해졌다. 우왕 때 장수들과 함께 여러 번 왜적을 방어하여 공을 세웠다.

황상이 부친의 기일에 원씨(元氏)를 처로 맞이하였고, 원씨도 세족의 딸로서 지아비가 죽은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중매도 없이 황상에게 개가했다. 헌사에서 탄핵하여 곤장을 치고 먼 고을로 유배할 것을 청했으나 우왕이 허락하지 않고, 원씨만 유배보냈다. 황상은 활을 잘 쏜다고 천하에 소문이 나서 원나라 순제(順帝)가 친히 직접 그의 팔뚝을 잡고 살펴본 적도 있었다. 죽은 후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들은 황윤서(黃允瑞)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상 [黃裳]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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