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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홍건적의 난 총지휘관 정세운 장군

by afsefe 2022. 12. 23.

정세운 장군은 홍건적의 난 총지휘관 이었다. 그당시 홍건적 10만병력을 전멸시킨 공로가 크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현재 국내에는 전혀 안알려져 있다는거다. 역사를 어느정도 안다해도 정세운 장군은 모른다. 아마 고려시대 인물이라서 그럴거다. 마지막 최후또한 순전히 시기심 때문에 죽었다. 홍건적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승승장구 하던 정세운은 그를 시기하던 김용(金鏞)의 흉계로 안우(安祐)에게 살해당했다.

고려사의 단점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고려사는 세종때 쓰인 역사서인데 그러다 보니 시기적으로 세종시기와 합쳐져서 쓰인다는 것이다. 공민왕 8년글에보면 조선에서 적을 몰아냈다고 쓰여있다. 그당시 고려인들이 고려를 조선이라 부르지는 않았을것이다.

 

※ 국역 고려사 : 열전

정세운

[ 鄭世雲 ]

한자 원문  한글 번역문

정세운(鄭世雲)은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 장택현(長澤縣 :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군) 사람이다. 공민왕이 숙위(宿衛)하러 원나라에 갔을 때 호종했으며 거듭 벼슬해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왕이 즉위하자 호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김용(金鏞)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았다. 양광도(楊廣道) 안렴사(按廉使) 김남득(金南得)1)이 쿠치[忽赤]이자 중랑장(中郞將)인 정곡(鄭谷)을 곤장쳐 욕을 보이자, 정곡의 동료 권석화(權石和) 등이 왕에게 고소하였다. 정세운과 김용은 김남득과 친했으므로 왕에게 부탁해 권석화 등을 곤장쳐 바닷섬으로 유배보내었다. 또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임군보(任君輔)를 총애하는 것을 꺼려 김용과 함께 허위로 왕의 교지를 꾸며 제주(濟州 : 지금의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이후 군부판서(軍簿判書)·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하였으며, 기철(奇轍)을 처단한 공을 인정받아 일등공신이 되었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을 함락시키자 정세운은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로 임명되었으며,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에서 돌아와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적들이 서경으로 들어가 땔나무를 저장하고 성을 수리하는 것으로 보아 곧 개경으로 쳐들어올 계획이 없는 듯하니, 백성들을 놀래게 하거나 동요하지 않게 하여 민심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옮겼다. 왜적이 양광도(楊廣道)를 침구하자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직할시)에 계엄을 내리고 백관들로 하여금 종군(從軍)하게 하였다. 이에 간관(諫官)들이 왕궁에 와 하직인사를 올리자 정세운이,

 

“간관들이 종군한다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로, 나라의 체통에 관계됩니다.”

고 아뢰어 결국 종군을 면제시켜 주었다.

 

10년(1361),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시키자 왕은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로 피난 갔는데, 정세운이 추밀(樞密) 겸 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으로 호종했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했으며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개하면서 적군을 소탕해 개경을 되찾겠다고 자임했기 때문에 왕도 그를 의지하고 믿었다. 정세운이 왕에게,

 

“책임을 통감한다는 교서를 빨리 내려 민심을 달래고, 사자를 보내어 여러 도(道)의 군사들을 독려해 적들을 토벌하게 하소서.”

라고 누차 청하니, 왕이 마침내 정세운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았다. 이어 다음의 교서를 내렸다.

 

“천하가 안정되면 재상에게 관심이 모이고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수에게 관심이 모인다고 하였다. 시대 상황의 잘잘못이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태조께서는 일찍이 왕업을 여신 이후 역대의 성군들께서 왕위를 계승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러나 과인의 대에 와서 무사안일에 빠져 국방에 관한 일을 내팽개친 채 돌보지 않은 결과 홍건적의 침범을 초래해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종묘사직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제 장수들을 분산 파견하여 병력을 합해 적들을 치게 하려는 바, 정세운에게 지휘권[節鉞]을 부여하노니 가서 그 군사들을 통솔하면서 명령에 순종하는 군사들과 거역하는 군사들을 구별해 상과 벌을 내리라. 각처의 군관과 군인들 가운데 통제를 고의로 위반하거나 위계를 뛰어넘어 직접 나에게 보고하는 자를 군법에 의해 처리하는 것을 허용한다. 아아! 출정하는 군대를 군율로 통제하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선행해야 할 일이며, 나라를 위해 집안을 잊는 것은 신하의 당연한 급선무이다. 너희 군사들은 나의 지극한 마음을 명심하라.”

 

정세운이 도당(都堂)으로 가 분연히 소리를 높였다.

 

“나는 극히 한미한 출신으로, 나 같은 자가 재상이 되었으니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죽령(竹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의 고개) 이남의 거주자로 주상을 호종한 사람들에게는 양곡을 지급하지 않고 종군하도록 결정이 이미 내려졌는데, 지금 왜 시행되지 않는가? 국가 기강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난국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이어 유숙(柳淑)에게, 자신이 내일 출정할 것이니 가서 군대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유숙이 전 부대가 이미 죽령(竹嶺)의 대원(大院)에 당도해 있다고 보고하자, 정세운은, “부대가 늦게 집결하면 공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엄포를 놓자 유숙이 즉시 가서 집결을 독촉하였다. 또 김용에게 말했다.

 

“지금 두 재상께서 적의 침략을 이처럼 장난으로 여기고 있으니 누가 본받지 않겠소? 만약 적들을 섬멸하지 못하면 비록 산골에 도망하여 숨더라도 어찌 살 수 있을 것이며 나라를 보전할 수 있겠소?”

 

수시중(守侍中) 이암(李嵒)이 정세운을 격려했다.

 

“들이닥친 도적떼 때문에 지금 임금과 신하가 피난을 떠나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니 우리나라의 수치요. 그러나 공께서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어 지휘권[斧鉞]을 쥐고 군사를 일으키니 사직이 다시 안정되는 것과 왕업이 중흥되는 것은 이번 출정에 달려있소이다. 공께서는 부디 힘을 다해주시오. 우리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께서 승리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오.”

 

정세운이 출정할 때 그를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로 승진시켰는데 그 위계가 이상(二相)과 삼재(三宰)의 중간이었다. 왕이 우다치[亏達赤] 권천우(權天祐)를 보내어 의복과 술을 내려주자, 정세운이 그 편에 다시 아뢰었다.

 

“장수 가운데 적을 잡았다는 보고를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먼저 포상할 일을 결정하지 마소서. 저도 비록 적을 포획하더라도 보고를 감히 올려 역마를 번거롭게 하지 않을 것이며 큰 전투가 끝난 후 모든 전황을 보고하여 올리겠습니다.”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특별시) 사람 고경(高敬)이 군영 앞에 와서, 평양부의 백성들 가운데 적으로부터 탈출한 사람이 무려 1만 명이나 되니 장수를 보내 위로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세운이 크게 기뻐하며 예부상서(禮部尙書) 이순(李珣)을 보내어 그들을 위무한 후 개경으로 가도록 독려했다. 11년(1362), 정세운이 장수들을 독려해 개경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도솔원(兜率院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물러나 진을 쳤다.

 

홍건적들이 평정되자, 대장군(大將軍) 김한귀(金漢貴)와 중랑장(中郞將) 김경(金景)으로 하여금 승첩을 알리는 글[露布]을 받들고 행재소(行在所)로 가게 했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세상을 구제할 마음을 품으시고 널리 인재[俊彦]를 구하셨는바, 당시 저는 군무를 책임지라는 명령을 삼가 받들고서 전하의 성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제가 듣건대, ‘흥망은 운수에 달려 있고 치란은 끝이 없으되,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 가운데 외침을 막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태왕(太王)이 빈(邠)땅을 떠난 것은 적인(狄人)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명황(明皇)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촉(蜀)으로 피난간 것은 갈구(猲狗)의 침략을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미(赤眉)를 소탕함으로써 한나라가 중흥하고 황건적(黃巾賊)을 쳐부숨으로써 위나라가 정통을 이은 것은 그 모두가 시운(時運)이지 인력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지난해 11월 천벌을 두려워 않는 강한 적을 만났으니 그 극악함은 승냥이나 범보다 더했습니다. 놈들의 군사 작전은 손무(孫武)17)나 오기(吳起)라도 맞서기 어려웠을 것이니, 나날이 방자해져서 세상 아무도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승승장구하여 중국 천하를 횡행하다가 멀리 원정을 떠나 우리나라로 바로 들어와 크게 기세를 떨쳤습니다. 놈들의 성난 칼날을 당해낼 수가 없어 풍문만 듣고도 모두 저절로 무너졌으며, 백만의 정예군이 오랫동안 도성(都城)에 진을 치니 수많은 백성들은 길바닥에서 정처 없이 떠돌게 되었습니다.

 

아아! 백성들은 진흙탕과 숯불에 빠진 것보다 더 괴로움을 겪었고 더구나 전하도 멀리 피난 가시게 되니 장수와 재상들은 깊은 근심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구름같이 집결한 군사를 진격시켜 개미떼 같은 오랑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들이 물을 쏟아 붓는 듯한 기세를 탔으니 적을 공격하는 것이 어찌 어려웠겠습니까? 흉악하고 어리석은 놈들이 쪼개지는 대와 같이 아군의 칼을 맞고 혼백조차 흩어져버렸습니다. 천하가 제압할 수 없었던 놈들을 제압하고 온 세상도 죽일 수 없었던 놈들을 죽임으로써, 솥 속에 든 물고기와 그물 안에 든 토끼처럼 꼼짝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전단(田單)이 썼던 비정상적인 병법을 무엇 하러 본받겠습니까? 제갈량(諸葛亮)의 팔진(八陣)법이야말로 이번 전투의 교범으로 삼을 만한 것입니다. 이소(李愬)가 눈밭을 넘어 성으로 들어가 채주(蔡州)의 땅을 빼앗았고, 한신(韓信)22)은 배수의 진을 쳐 조나라의 누벽[趙壁]에 있던 깃발을 빼앗았으니 이 둘은 서로 다른 역사적 사건이긴 하나 의로운 작전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기해년(공민왕 8, 1359)에 군사를 규합해 조선(朝鮮)에서 적을 소탕한 것과 강폭한 적의 침략을 재차 이겨낸 것은 모두 저희들의 업적이 아니고 그 모두가 전하의 공로입니다. 하늘이 전하께 용맹과 지혜를 주시니 그 성스럽고 근신하는 덕은 나날이 더해갔습니다. 아름다운 교화가 멀리까지 전파되어 중국 삼대(三代)의 예악(禮樂)을 따르게 되었으며 문덕(文德)을 널리 펼치시니 우임금 때처럼 동·서 계단에서 문·무의 춤을 아룁니다. 올빼미와 파경(破獍)같이 불효한 자를 순치시키고 개나 양같은 야만인을 복종시키는 것은 모두 성스러운 덕화와 지극한 인덕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운수가 막혔다가 다시 통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니, 지금이야말로 국가를 중흥할 때이며 진실로 만사를 새로 시작할 때입니다. 저희들은 앞다투어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을 떨쳐 우리 조정에 평안을 가져온 후 박수치며 기뻐하는 정성을 펼치겠습니다. 전하가 계신 행재소(行在所)를 멀리서 우러러보고 있나이다.”

 

왕이 기뻐하며 김한귀에게 황금 25량과 비단 2필을, 김경에게 비단 2필을 내려주었으며 곧 내첨사(內詹事) 이대두리(李大豆里)를 보내어 정세운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고 태후(太后)와 공주(公主)도 의복과 술을 하사했다. 얼마 후 정세운이 안우(安祐) 등에게 피살되었는데, 홍언박(洪彦博)은 그 소식을 듣더니, “총병관(摠兵官)이 출정할 때 말과 태도가 매우 오만하였으니 화를 입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였다.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으며, 또 신축년 호종했던 공과 개경을 수복한 전공을 기려 모두 일등공신으로 추록(追錄)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세운 [鄭世雲]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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