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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33

성종시대 고산리 전투 여진 도적떼들과 고산리에서 조선군과 싸운 전투, 이 전투에서 여진족 80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작은 승리였지만 그래도 이긴 전투라고 성종실록에 고산리 라고 치면 많이 나온다. 그중에서 본문에 붙여놓은 실록글이 가장 자세히 쓰여있다. 이실록글 처음부분 보면 적이 총몇명인지는 모르겠다고 쓰여있다. 마지막 글에는 총 80명 죽였다고 쓰여있다. 여진족과 싸운 이유는 여진족들이 조선을 약탈할려고 온것이다. 그래도 조선중기에는 적만 보면 조선군들은 도망쳤는데 안도망가고 싸운것은 역시 초기라서 그럴까, 솔직히 여진족들이 약탈하러 많이 왔었다. 본문글은 기니간 안읽어도 상관없지만 이긴게 신났는지 기승전결을 제법 자세히 기록했다. ※성종실록 257권, 성종 22년 9월 4일 정축 3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 2023. 1. 4.
정동과 강옥 중국 사신이 뜯어간 물품들 성현 문집 - 성현은 세조시대 훈구대신으로서 대표할만한 문장가 이다. ※허백당집 습유 제1권 / 시(詩) 중국 사신 정동과 강옥에게 능단, 겸백, 보석, 약재 및 어주의 훌륭한 음식을 무려 수천 바리나 바치다 〔天使鄭同姜玉獻綾段縑帛金玉藥餌及御廚美味無慮數千馱〕 엄청난 토산품들 찬란하게 빛이 나니 / 紛紛珍産爛揚光 바라보는 사람마다 눈이 휘둥그레지네 / 擧目人人總駭惶 검은 용의 턱 밑에서 만 개의 구슬 뽑고 / 探得驪龍珠萬顆 직녀의 베틀에서 천 문장을 잘라 낸 듯 / 織分天女錦千章 어주의 가지가지 귀한 음식 실어 내고 / 膳肴貴出天廚味 이국의 향기 나는 약재 멀리 수송하네 / 藥餌遙輸異國香 골짝처럼 깊은 욕심 채우기가 어려우니 / 溝壑難盈多嗜欲 내탕고에 공로 갚을 물건 동이 났으리라 / 帑藏無物可堪償 ​ [.. 2023. 1. 3.
소를 아꼈던 조선 성종실록 261권, 성종 23년 1월 16일 정해 6번째기사 1492년 명 홍치(弘治) 5년 소를 도살한 사람을 추쇄하여 전 가족을 외딴 섬으로 옮기게 하다 형조(刑曹)에 전교하기를, "소를 도살(屠殺)한 사람을 추쇄(推刷)하여 전가(全家)를 절도(絶島)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2023. 1. 3.
원각사와 봉선사 원각사 청기와 원각사 는 세조가 창건했지만 연산군 때 폐사되어 절을 허물어 버렸다. 1.)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6월 12일 갑오 2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홍윤성을 불러 원각사 법당을 덮을 청기와에 대해서 논의하다 와요 제조(瓦窯提調)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을 불러 원각사(圓覺寺) 법당(法堂)에 덮을 청기와[靑瓦]를 의논하니, 모두 8만 장(張)이라 구워서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컸었다. ​ ​ 봉선사 청기와 예종1년에 세조의 비 윤씨가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지금은 청기와가 없다. 2.) 성종실록 218권, 성종 19년 7월 17일 무인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윤민 등이 차자를 올려 유효손 등의 노비의 속공과 봉선사 보수에 관해 .. 2023. 1. 1.
기자조선 계승국 한국 사학계에선 기자조선은 부정하고 있는데 정작 이성계의 조선은 기자조선을 계승했다. 이성계는 국호를 명태조에게 골라달라고 하고 조선후에 봉해졌다. 기자가 주무왕에 의해 제후로 봉해진것과 같다며 기자조선을 찬양하고, 기자조선을 이어받아 선정을 배풀겠다고 한다. 이나라의 정체성을 의심해 볼만하다. 정도전 (鄭道傳, 1342∼1398) 삼봉집 제13권 조선경국전 상(朝鮮經國典 上) 국호(國號) 해동(海東)은 그 국호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선(朝鮮)이라고 일컬은 이가 셋이 있었으니, 단군(檀君)ㆍ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바로 그들이다. 박씨(朴氏)ㆍ석씨(昔氏)ㆍ김씨(金氏)가 서로 이어 신라(新羅)라고 일컬었으며, 온조(溫祚)는 앞서 백제(百濟)라고 일컫고, 진훤(甄萱)은 뒤에 후백제(後百濟)라고 일컬었다. .. 2022. 12. 31.
조선 초기 금서 목록 조선은 유교사상과 안맞는다고 음양서적을 모조리 불사질러서 음양사상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 여러 책중에 고조선 비사 등 신기한 책들이 있다. 이책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은 없으니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인터넷 사전을 확인하니 왕조교체기 당시 여러 예언사상과 비밀기록 등 이라서 금서로 지정하고 모조리 없앤거라고 한다. 그 인터넷 사전은 밑에 링크 첨부 했다. - 이방원 - 태종 34권, 17년(1417 정유 / 명 영락(永樂) 15년) 12월 15일(병신) 1번째기사 서운관에 간직한 참서를 불사르다 서운관(書雲觀)에 간직하고 있는 참서(讖書) 두 상자를 불살랐다. 풍속이 전조의 습관을 인습하여 음양 구기(陰陽拘忌)를 혹신하여 부모가 죽어도 여러 해를 장사하지 않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박은(朴訔)·조말생(.. 2022. 12. 29.
야사로 보는 이성계 7년 함경북도 정벌 이성계 7년 함경북도 정벌 https://iece12345.tistory.com/119 임하필기 내용은 전부 과장시킨 내용들이다. 요동에 있던 모든 여진 추장들이 투항했다고 쓰여있고, 티무르 왕조도 투항했다고 쓰여있다. 과장이 심하다. 조그만 강은 두만강을 뜻하는걸거다. 원래 이성계 7년에 함경북도를 정벌 했지만 사학계에서 숨기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임하필기 제13권 /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북쪽 폐사군(廢四郡)의 고사(故事) 고려 때에 안변(安邊) 이북의 땅은 여진(女眞)들이 차지하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정령(政令)이 여기에까지 미치지를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 태조(太祖)가 명을 받고 이두란(李豆蘭)을 시켜서 야인(野人)의 추장들을 무마하여 귀부(歸附)하게 하였던바, 드디어 이란두만(移蘭豆.. 2022. 12. 27.
이성계 7년 함경북도 정벌 함경북도 경원군 옛이름 공주 한국 사학계에서 숨기는것 중 하나가 이성계 7년에 함경북도를 정벌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비어있는 땅에 성만 쌓고 끝났다. 원래 그지역 추장은 이지란 으로서 고려말에는 비어있는 땅이었다. 그러던중 이방원 당시 여진족 1개 부족 동맹가첩목아 에게 뺏긴후 세종때 까지 여진족 땅이었다가 여진족 들끼리 싸워서 동맹가첩목아 부자가 살해당한다. 이때가 기회다 해서 정벌한게 세종 4군 6진이다. 함경북도에는 이씨왕조 조상 묘가 있었다. 1.)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8월 2일 을해 2번째기사 / 정도전 대신 이지란을 동북면 도안무사로 삼다 이지란(李之蘭)으로 정도전을 대신하여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로 삼았다. 2.)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8월 12일 을유 1번째기사.. 2022. 12. 27.
처녀를 바치는 조선 주원장이 조교를 얼마나 잘해놨는지, 전쟁한번 없이 이정도 효과를 냈다는 건 정말 대단한 황제다. 이게다 조선 이씨왕조는 정당성, 정통성 없는 왕조라서 그런거다. 금은 조공, 처녀 고자 조공, 말 조공등 명나라 요구를 전부 들어주며 무리수를 두고 구걸하듯이 책봉을 받으면, 명나라 제후라는 막강한 후원을 얻을수 있다. ※ 태종실록 15권, 태종 8년 4월 16일 갑오 1번째기사 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흠차 내사 황엄·전가화 등이 명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은과 비단을 보낸다는 내용 조정(朝廷)의 내사(內史) 황엄(黃儼)·전가화(田嘉禾)·해수(海壽)·한첩목아(韓帖木兒)와 상보사 상보(尙寶司尙寶) 기원(奇原) 등이 오니, 산붕(山棚)을 만들고 나례(儺禮)와 백희(百戲)를 베풀고, 임금이 백관(百官)을 .. 2022.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