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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33

이방원을 무시했던 양자산 이방원이 양자산에게 광연루 난간을 자로 재게 했더니, 자산이 틀렸기 때문에 이방원이 꾸짖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자산이 분노하여 자를 도랑에 던져 버렸다. 조선 초기에 보면 이씨왕조를 무시하며 왕대접을 안했던 일이 많았다. ※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28일 계사 1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상왕이 환관 김천 등 5인의 죄를 의논하여 법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다 양자산이란 자는 좌우에서 심부름하고 있었는데, 전번에 내가 자산을 시켜 광연루(廣延樓)의 난간을 자로 재게 하였더니, 자산이 그것을 재는데 틀렸기 때문에, 내가 꾸짖었더니, 자산이 분노하여서 그 재던 자를 도랑 속에 던진 까닭에, 내가 그 무례한 것을 노하여 문을 지키게 하였다가 곧 그 본직으로 돌려보냈는데, 자산은 즐겨 번.. 2023. 5. 21.
하급관리 에게 모욕당한 이방원 하급 관리 반감 매룡 ※반감飯監 - 음식물과 여러 물건의 진상을 맡아보던 벼슬아치. 이방원이 강원도에 갔을때 노비 도이에게 반찬을 맡겼다. 도이가 매룡에게 고기를 달라고 청했더니 매룡이 누워서 대답하기를 ‘내게 무슨 물건이 있어서 네게 줄 수 있겠는가. 나의 불알 이나 베어 가라. ’고 하였다.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 9월 28일 계사 1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상왕이 환관 김천 등 5인의 죄를 의논하여 법에 따라 시행하도록 명하다 내가 강원도에 거둥하였을 때, 마침 몸이 좀 불편하여 시녀를 데리고 갔었는데, 공녕군(恭寧君)의 어미 되는 자도 따라갔었다. 그리하여 본 궁노(宮奴)인 도이(道耳)를 시켜서 반찬을 맡게 하였더니, 도이가 매룡에게 고기를 달라고 청하였는데, 매룡이 누워서.. 2023. 5. 20.
조선시대 국민 부채뜯기 4 조선시대 국민 부채뜯기 3 https://iece12345.tistory.com/270 조선은 가뭄이 들어 그해 국민이 세금을 못내면 그 세금은 개인 부채(負債)로 쌓이는 구조다. 이 성종시대 실록글은 백성들이 낭비를 못하도록 곡식을 관부에서 간직하는게 어떠냐에 대해 의논하는 글이다. 그러나 웃기게도 이 계책은 실행되지 못했으니 그 이유는 조선은 영세 농업국가 였다. 평민들은 먹을것도 없는데 낭비할 곡식이 어딨겠냐고 말하면서 반대한다. 성종실록 198권, 성종 17년 12월 14일 을유 1486년 명 성화(成化) 22년 양양부사 유자한이 상소하여 백성의 사곡을관부에 간직하여 낭비를 막기를청하다 심회(沈澮)는 의논하기를, "백성의 사곡(私穀)을 거두어서 관부(官府)에 간직하여 백성이 낭비하지 못하도록 하는.. 2023. 5. 18.
사림파 조광조의 조상 조온 조광조는 사림파의 영수(領袖)다. 영수는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사학계에서는 사림파가 조선왕조를 반대하고 낙향한 인물들이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선조 양절공 조온은 전혀 그런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조온은 조선 개국공신 중 한명이고, 조온의 아버지 양렬공은 이자춘의 딸과 결혼하여 조선왕조와 친족으로 이어져 있다. 그외에도 사림세력이 화를 당한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의 인물 90여명중 70퍼센트 정도가 한양 거주자 였다. 더군다나 세조의 찬탈에 협력한 사람들이 공신책봉을 받았는데 이때당시 훈구파들은 사장학자들이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곧 문학 이냐 도학 이냐의 싸움이었다. 역사 지식이 짧은 사람들이 이걸 이해 못하는 이유는 고려시대를 이해 못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는 사장학과 불교.. 2023. 4. 6.
조선 초기 사무역 금지 이성계는 국민이 국경을 넘어 무역을 할경우 다 죽이라고 하고있다. 조선 같은 나라에서는 국민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을 경우 사형이었다. 이당시에 비교하면 지금은 진짜 좋은 나라에서 살고있는 거다. ※태조 2권 1년 (1392 임신 / 명 홍무 25년 12월 24일 경오 ) 의주 등지에 감찰을 파견하여 국경을 넘어 무역 하는 것을 금하게 하다 감찰(監察)을 의주(義州) 등지에 보내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무역 하는 것을 금지 하게 하였다. ※태조 6권, 3년(1394 갑술 / 명 홍무(洪武) 27년) 6월 1일(기사) 1번째기사 도평의사사에서 의복 기구 패물 등의 검소화에 대해 건의하다 금과 은은 또 해마다 공물(貢物)로 바치게 되어 대기 어려운 것인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다 통용하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2023. 3. 29.
시녀 장미의 최후 이방원이 밤에 시녀 장미에게 안마를 시켰다. 근데 안마 실력이 션찮아서 꾸지람을 줬더니, 시녀 장미가 그에 욱해서 아주 쌔게 두둘겼다. 그에 이방원은 처음엔 궁궐에서 쫒아내는걸로 끝냈으나, 최근들어서 왕실에 대한 불경함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왕실 기강을 바로 잡기위해 다시 불러들여서 본보기로 잡아죽인다고 쓰여있다. 이 실록글에서는 세명이 불경함을 저질렀다. 전부 실록에서 자료를 볼수 있다. 1, 시녀 - 공비의 의복을 찢어버렸다. 2. 김천 - 반우거에 앉아서 놀았다. ※반우거 - 국장에쓰는 수레 3. 매룡 - 하급 벼슬아치 로서 왕실을 모욕했다. 세종실록 10권, 세종 2년 10월 11일 병오 1번째기사 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상왕이 장미와 공비의 옷을 찢은 시녀를 처벌할 것을 명하다 상왕.. 2023. 3. 22.
2살된 이방원 아들의 사망 이당시는 태상왕 - 이성계(1408), 상왕 - 이방과(1419) 전부 살아 있을때였다.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 7월 1일 무자 1번째기사 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상왕의 탄일에 2살된 왕자가 죽다 종척 대신(宗戚大臣)을 상왕전(上王殿)에 보내어 헌수(獻壽)하였으니, 상왕(上王)의 탄일(誕日)인 때문이었다. 마침 이날에 왕자(王子)가 죽었는데, 나이 두 살이었다. 조회를 2일 동안 정지하고, 백관이 대궐에 나아가 조상하고 위로하였다. 영삼사사(領三司事) 하윤(河崙)·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李茂) 등이 성례(盛禮)를 써서 장사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하상(下殤)에도 미치지 못하였는데 무얼 성례(盛禮)를 쓰랴?" [註 067] 하상(下殤) : 여덟 살에서 열세 살까지 사이에 요절.. 2023. 3. 20.
부엉이를 무서워 했던 조선왕들 실록에 부엉이 라고치면 많이 나오지만 왕별로 하나씩만 축약했다. 부엉이가 울었을 경우 궁궐을 떠나거나 중들을 모아서 빌거나 해괴제를 지냈다. 그러다가 세조시절 부엉이가 울어도 아뢰지 말라고 일렀다. 세조시대 이후로는 부엉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 해괴제(解怪祭) - 나라에서 괴이한 사건이 생겼을 때에 지내던 제사. ※ 기양(祈禳) - 재앙(災殃)은 물러가고 복(福)이 오라고 비는 일. 태조실록 15권, 태조 7년 9월 10일 임오 1번째기사 / 밤에 부엉이가 경복궁 북원에서 울다 밤에 부엉이가 경복궁(景福宮) 북원(北園)에서 울므로, 상왕(上王)이 북쪽 양정(涼亭)으로 옮겨 가서 거처하였다. 정종실록 2권, 정종 1년 8월 15일 임자 1번째기사 / 부엉이가 솔개에 쫓겨 근정전 위에 와서 모이자 .. 2023. 3. 17.
마천목의 도깨비 방죽 ※ 마천목 - 고려말 조선초 무신 ※임실현(任實縣) - 전라북도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 상(寒竹堂涉筆上) 도깨비 방죽 임실현(任實縣) 오원(梧原) 땅에 도깨비 방죽이 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마 부원군(馬府院君)이 한미(寒微)할 때에 하루는 시냇가로 고기를 낚으러 갔다가 오색(五色)의 영롱한 괴이한 돌 하나를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보물로 간직하였는데 밤중에 도깨비 수만 명이 와서 엎드려서 애걸하기를, “귀왕(鬼王)이 부(符)를 분실했는데 족하(足下)께서 그것을 얻으셨습니다. 원컨대 급히 돌려 주십시오.” 하였다. 그러자 마 부원군이, “부(符)란 어떤 물건이냐?” 하니, 도깨비가, “아까 얻으신 괴이한 돌이 그것입니다.” 하였다. 마 부원군이 더욱더 허락하지 않자, 도깨비가, “족하께서 만약 하시고.. 2023. 3. 13.
중국 까지 휩쓴 고려도적들 고려말 때 보면 고려도적들이 많이 활개쳤다. 재밌는 점은 중국 해안까지 진출 했었다는 거다. 이글을 분석해 보면 처음 두번째줄 "그안에" 와 첫문단 마지막 번째줄 "하였으니, 신은 억울해 견딜 수 없습니다." 는 이성계가 한말이다. 그 중간은 전부 명태조 주원장이 한말이다. 즉 이성계가 명나라 사신 황영기가 준 주원장의 글을 보고 혼자서 변명을 하는거다. 물론 조선에서 명황제에게 보낸 글에 다있을거다. 주원장이 한말을 보면 조선 도적들이 중국 해안까지 와서 중국인들을 죽이고 약탈했으며 정탐까지 했다는것이다. 고려도적들이 이미 대선박을 이용해 활개 쳤다는것을 알수있다. 최영의 홍산대첩이나, 이성계의 황산대첩 등도 일본 쪽에선 고려도적들이 소행이라고 보고있다. 솔직히 그 내용들을 보면 왜구가 아니라는 힌트들.. 2023. 2. 4.
원각사의 최후 원각사는 고려시대 사찰인데 원래 이름은 흥복사 였다. 이성계때 조계종 본사가 되었으나 곧이어 세종때 폐사되어 관청으로 삼았다가 세조 10년에 다시 고쳐짓고 원각사라 칭하고 부흥하는듯 하나 연산군때 폐사되어 절을 허물어 버렸다. 현재는 원각사비 가 남아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 ※용재총화 제7권 원각사(圓覺寺)는 본시 큰 절인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서의 선당(禪堂)이 있을 뿐이었다. 관습도감(慣習都監 세종대왕 .. 2023. 1. 7.
성종의 억상책 성종실록 20권, 성종 3년 7월 27일 임술 6번째기사 1472년 명 성화(成化) 8년 호조에서 전라도의 상인의 장문에 대해 아뢰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전에 전교를 받드니, ‘폐단을 진술한 사람이 말하기를, 「전라도(全羅道) 무안(務安)등 모든 고을에서 상인들이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여러 사람이 모여 폐단을 민간에 끼친다.」 하니, 장문을 폐해야 하느냐 두어야 하느냐를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으므로, 신 등이 전라도 관찰사 김지경에게 이문(移文)하였더니, 김지경이 보고하여 이르기를, ‘도내 여러 고을의 인민이 그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데, 비록 있는 물건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고 하나, 근본을 버리고 끝을 따르는 것이며, 물가(物價)가 올라 이.. 2023.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