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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59

조선말 세계 인지도 조선의 국기는 1883년에 만들어 졌다. 그러나 세계는 조선이란 나라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자료를 통하여 그당시 조선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2집 국역윤치호영문일기2(한국사료총서 번역서2)>1893년(조선개국 502년, 고종 30년, 계사년)>9월 28일 시카고. 아침식사 후 박람회에 갔다. 건물마다 거의 모든 나라의 국기가 펄럭였는데 어떤 건물에도 조선의 국기가 없어 모욕감을 느끼었다. 아! 조선의 처지가 이처럼 낮고 조선의 부끄러움이 이처럼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한 건축기술을 한껏 뽐내던 건물들이 한두 달이 지나면 평평한 땅으로 변할 것이다. 아, 덧없는 무상함이여! 이 건물들을 없애야 하는 이유는 건축 자재가 기후를 이겨.. 2023. 3. 7.
일본과 미국의 비교 윤치호는 200년을 내다보고 있는데 지금 100년차지만 가망이 없어보인다. 공부는 일본인보다 더 많이 하면서 못따라잡는거 보면 일본인 보다 열등해서 인가 ​ 10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10(한국사료총서 번역서10)>1939년(기묘년)>10월 14일《토요일》 쾌청. 도쿄. 우리 아들들의 하숙집에서 잘 쉬었다. 나는 어떤 조선인이 미국이나 유럽을 갔다 와서는 도쿄의 건물과 거리를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도쿄를 얕보는 듯이 말하는 걸 들으면 참을 수가 없다. 조선인이라면 마땅히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겸손해져야 한다. 도대체 조선이 미국이나 유럽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조선인들이 능력과 능률면에서 일본인들을 따라잡으려면 200여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2023. 3. 6.
조선인은 어떤 민족인가 이글에서 윤치호 선생은 조선민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읽어보면 하나도 틀린말이 없다. 어떻게 해서 이런민족이 만들어 졌는지 잘 생각해봐야 할것이다. ※ 2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2(한국사료총서 번역서2)>1894년(조선 개국 503년, 고종 31년, 갑오년)> 11월>1일(음력 4일) 《목요일》 대체로 맑은 날. 1일(음력 4일) 《목요일》 대체로 맑은 날. 학교가 파한 후 보선가(寶善街) 혹은 광동로(Canton Rd.)의 중국 여관 장춘잔(長春棧)에서 몇몇 조선인을 만났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의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다. 현재 거류지에 60명 이상의 조선인이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평안도에서 왔고, 그리고 상하이에 그들 대부분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내지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 2023. 1. 31.
윤치호의 하인 조선시대 문맹률은 99% 였다. 한글조차도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양반층 일부에서나 쓰였던게 한글이다. 윤치호의 하인만 봐도 잘보여준다. 일제시대 에서는 문맹률이 78% 였다. 9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9(한국사료총서 번역서9) >1935년(을해년)>4월>17일《수요일》 사랑스런 날. 17일《수요일》 사랑스런 날. 서울 집.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하인을 과천에서 데려오고 있는데, 그들이 더 남쪽에서 오는 아이들보다는 좀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도 충분히 멍청한 면이 있다. 처음 왔을 때는 고분고분하고 부지런하지만 곧 비난을 받게 된다. 그 후에 게을러지게 된다. 종종 믿을만한 사람도 그렇다. 그들이 갖고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은 돈 문제에서 너무 무능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글 언문조차도 배우려는.. 2023. 1. 26.
고종의 죽음에 울부짖는 조선인들 고종 자살설 https://iece12345.tistory.com/144 고종 자살설 다음으로 이어지는 글이다. 6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한국사료총서 번역서6)>1919년(기미년)>1월> 27일 《월요일》 맑고 추움. 섭씨 4도. 오전에는 집에 있었다. 오후 12시 30분에 성안식(成眼式)에 조의를 표하러 궁으로 갔다. 대한문은 지난 6일 동안 밤낮으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천 명의 조문객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엎드린 채 통곡하는 놀라운 모습을 목격하고 있다. 2023. 1. 24.
조선을 본 윌리엄 길모어 서양인교사 윌리엄 길모어 서울을 걷다 , 살림 출판사 14p-16p 무심한 여행자 에게 한반도는 일본 처럼 매력적 이지 않다. 여행자 들은 아름다운 삼나무 숲에 자리한 흥미로운 사원을 이나라에서는 발견하지 못할것이다. 멋진계곡에서 장관을 연출하는 신사도 없고 여행객이 머물고 싶게 유혹하는 숲도 거의 없다. 눈을 즐겁게 하고 지갑을 열게 만드는 예술품 공방도 없다. 수도인근 지역의 숲은 벌거벗은 상태이다. 나무와 풀로된 망토가 벗겨져 버린 산은 작열하는 태양과 휩쓰는 빛줄기에 노출되어 있다. 산의 황량한 부분은 한여름 홍수가 만든 물길들로 골이 파이고 갈라져 있다. 해안을 따라 항해할 때도 일본의 내륙해를 지날때와 같은 세련되고 아름다운 광경은 보이지 않는다. 발랄한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이나 강도짓이나 사.. 2023. 1. 7.
중국 속국의 현실 일본 종이가 좋으니 만드는 법을 배워오고, 일본에 금이 많이 생산된다고 하니 명주와 모시를 가주고 살수있으면 중국에 갖다 바치자고 한다. 전쟁 한번 못하고 저렇게 된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세종실록 41권, 세종 10년 7월 1일 신해 3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일본에서 《백편상서》를 사오게 하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말하기를, "일본국(日本國)에 《백편상서(百篇尙書)》가 있다고 들었는데, 통신사(通信使)로 하여금 사오도록 하고, 또 왜국의 종이는 단단하고 질기다 하니, 만드는 법도 배워 오도록 하라." 하니, 지신사(知申事) 정흠지(鄭欽之)가 계하기를, "일본국에는 금이 많이 생산되니, 명주와 모시[苧布]를 가지고 가서 사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중국.. 2022. 12. 31.
선조임금의 우울 전시대보다 나은 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선조가 푸념을 하는글 고려시대는 강했는데, 왜 조선은 약한가 고려시대는 문장을 잘했는데, 왜 조선은 그보다 못하는가 고려시대는 부유했는데, 왜 조선은 그렇지 못한가 선조가 말하는 걸 읽어보면 분명히 문제점을 알고있다. ​ 선조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기사 1605년 명 만력(萬曆) 33년 체찰사 한효순과 북로·남왜의 방어, 병졸 훈련·기계 수리 등에 관해 이야기하다 내 오늘의 일을 살펴보건대 우리 나라는 무략이 강하지 못하고, 조종조의 일로 말하여도 일찍이 한 번도 싸워서 승리한 적이 있지 않다. 우리 나라의 무략은 고려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알 수 없거니와 문치(文治)의 소치로 그렇게 된 것인가. 문장(文章)으로 말하더라도.. 2022. 12. 24.
세종시대 발명품 외바퀴 수레 보기엔 저래도 종 2품 재상만 탈수 있었던 최고급 세단이다. 세종때 발명되고 나라 망할때 까지 관리들이 타고다녔다. 초헌(軺軒) - 종 2품의 관리가 타는 외바퀴가 달린 가마 ※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 3월 23일 을축 2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상의원에 재상들이 탈 초헌과 일산을 만들게 하다 상의원(尙衣院)에 명하여 초헌(軺軒)과 일산[蓋]을 만들게 하였으니, 재보(宰輔)들에게 초헌을 타게 하려 함이었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4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신개에게 초헌을 주고, 2품 이상은 초헌을 타게 하다 영의정 황희(黃喜)와 우의정 신개(申槪)에게 초헌(軺軒)을 주고, 인하여 예조(禮曹)에 전지하기를, "이제부터는 이품.. 2022. 12. 22.
단청도 못칠했던 가난한 나라 요점 정리 1. 중기 이후 청기와 만드는법이 잊혀져서 고종년도에는 아는자가 없다. 2. 인조때 만든 선정전의 청기와가 수백년되었다. 중국 북경의 가옥은 대다수 채색기와 3. 임진란 이후 재력이 없어 단청도 못칠하게 금지했다.[단청-채색] 4. 임진란 이후 재력고갈로 관리의 녹봉도 삭감하여 10분에 1에 지나지 않는다. 7. 관서[평안도]와 관북[함경도]은 상납하는게 없다. 2도를 뺀 나머지 6도가 70만결미만, 서북도는 나머지 6도에 비해 헐하여 조세를 매길수 없다. 세금을 걷어도 관청의 운영과 급료 및 허다한 공공 경비로 쓴다. ​ 승정원 일기 고종 11년 갑술(1874, 동치13) 5월 12일(계축) 비 중희당에서 일강할 때 강관 김세균 등이 입시하여 《시전》을 진강하였다 ○ 사시(巳時). 상이 이르.. 2022. 12. 21.
병자호란 쌍령전투 조선 조총병 4만 VS 청기병 300명 연려실기술 제26권 - 이긍익[李肯翊]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 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2022.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