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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59

미군과의 전쟁 신미양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강화도에 무력 침략한 사건으로,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3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미양요 [辛未洋擾] (두산백과) 2023. 6. 5.
겁쟁이 조선 군인들 외국 배가 표류해서 조선 해안에 정박 했다. 조선군인들이 달려와서 총과 활을 당기며 위협했더니, 도리어 외국인들이 돌과 몽둥이로 공격하자 조선군인들은 도망갔다. 정조실록 43권, 정조 19년 8월 1일 기묘 2번째기사 1795년 청 건륭(乾隆) 60년 황해도 관찰사 서매수가 오차진에 이양선이 나타난 일로 치계하다 황해도 관찰사 서매수(徐邁修)가 치계(馳啓)하기를, "국적을 알 수 없는 배 한 척이 바람에 밀려와 홀연히 오차진(吾叉鎭) 앞에 정박하였기에 해당 첨사(僉使) 장경홍(張景泓)이 군교(軍校)를 이끌고 기계(器械)를 지니고서 급히 포구 가로 달려가 활을 당기고 총을 겨누며 위엄을 보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거꾸로 성을 내면서 일제히 상륙한 뒤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곧장 앞으로 .. 2023. 6. 2.
일본인들의 군중심리 2023. 4. 30.
맨 처음 기록되어 있는 어글리 코리안 윤치호 선생은 "천하에 조선인 같이 천한 자들은 없다" 라고 말한바 있다. 한국인 들은 천박하고, 매너없고, 교양없고, 민도도 낮고, 배려심이 부족한 민족이다. 지금 한국인 들은 외국에서 많은 민폐를 끼치다 보니 어글리 코리안 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맨 처음 기록된 자료를 보면 구한말 이다. 그 기록을 보면 조선인들이 미국에 가서 많은 민폐를 끼쳤다는걸 알수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들은 전부 양반들 이었다는 것, 아 조선에서 귀족이란 신분이 있었던가, 사는 꼬라지도 거지처럼 살고 행동에도 품위가 없으니 천한 것들이지, 그저 에헴이나 하는게 고작이다. 지금 현대 사회를 보면 누가 양반 신분이었는지 모르는 것처럼, 이 양반층들은 전부 상놈으로 흡수 되었다. 지금 일본사회를 보면 사무라이들이 명문가가.. 2023. 4. 24.
효종의 북벌론 효종의 북벌론은 야사에서만 나온다. 실록에 못적은 이유는 실록은 청나라 사신이 와서 마음대로 볼수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효종이 북벌 할려고 했으니 대단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대단한게 아니다. 할려고 한게 뭐가 대단하단 말인가, 시작이 반이란 말이 있듯이 했다와 안했다의 차이는 엄청난거다. 한국 사학계에서 정도전의 북벌론 과 효종의 북벌론을 띄워주는 것은 약해 빠진 나라의 자위행위와 같다. 입 으로는 세계정복도 가능하다. 연려실기술 제30권 효종조 고사본말(孝宗朝故事本末) 청 나라 사신이 사문(査問)하다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이경석을 위리안치하다. ○ 그때 청 나라 사신이, 우리나라가 자점을 쫓고 조정의 신하를 바꾼 것을 책하여 칙사 10여 패가 연달아 와서 힐문하기를, “너희.. 2023. 4. 1.
조선말기 선비의 개혁조항 선비들이 조선 500년 내내 상공업을 억눌러야 된다고 그렇게나 말하다가 나라가 망할즘에 상공업을 발전 시켜야 된다고 말하고있다. 조선인들은 언제나 이렇게 뒷북이다. ※유학 [幼學] 벼슬을 하지 않은 유생(儒生)을 칭하는 말. ※賃船 [ 임선 ] 삯을 주고 배를 빌리어 씀.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9월 20일 계묘 4번째기사 1882년 조선 개국(開國) 491년 군사 훈련과 상공업의 발전, 환곡 등에 관하여 조문이 상소하다 유학(幼學) 조문(趙汶)이 상소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의학기술을 각국에서 배워 그 정묘한 기술을 취하고, 사치한 기풍을 억제하며, 호포(戶布)를 없애고, 조운(漕運)은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임선(賃船)하여 자체로 바치게 하며, 환곡(還穀)에 대해서는 그.. 2023. 3. 31.
군밤장수와 고종 철종의 다섯아들 들은 전부 요절하여 후사없이 죽자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때 아무것도 모르는 12살에 왕다운 교육도 못받은 아이 였다. 세도 정치 시기 아니였으면 왕조차 못될 입장이었으나 철종 때는 세도정치가 들이 일자무식 농부 하나 올려 세웠다면 고종은 동네에서 놀고있는 어린이 하나 올려세운 것이다. 고종은 혈통만으로도 따지자면 왕이 될수 없는 위치 였다. 세도 정치가들 입장에서 고종이 멍청하게 생기고 나이도 어리고 배운것도 없기때문에 이용해먹기 좋았을 것이고 철종 때는 일자무식 농부 하나 올려세워 놔서 이용해 먹기 좋았을것이다. 이게다 세도 정치가들이 지들 마음대로 할 음모였던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가계는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로부터 파생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자빈 혜경궁 홍씨에게서 얻은 아들이 정조.. 2023. 3. 31.
증산교단 태을교(太乙敎) 태을교는 증산교단 이다. 자세한건 밑에 주석을 보자, 증산도는 지금도 있다. 윤치호는 일제가 각종 사이비 종교를 그냥 놔두는걸 불만스럽게 생각하고있다. 그러나 지금 현대에서도 사이비 종교는 그냥 놔두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똑같다고 할수있다. 사이비 종교에 쉽게 현혹되는 사람들은 이성력이 극히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1920년(경신년)>11월 9일 《화요일》 오전에 흐리다가 오후에 갬. 데라우치 정권의 결점이 무엇이든, 그리고 결점이 많았다고 해도 한 가지 잘한 일은 엄격한 기강을 세운 것이었다. 데라우치 정권하에서는 무당과 점쟁이, 온갖 부류의 정치 협잡배들이 자취를 감추어 법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이토 총독 치하의 이른.. 2023. 3. 28.
광무태황제 고종의 죽음 6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한국사료총서 번역서6)>1919년(기미년)>1월>23일《목요일》흐리고 포근함. 눈이 조금 내림. 섭씨 4도. 23일 《목요일》 흐리고 포근함. 눈이 조금 내림. 섭씨 4도. YMCA에 출근했다. 평균적 조선인은 10퍼센트의 이성과 90퍼센트의 감성으로 이뤄져 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광무태황제의 승하 때문에 왁자지껄하고 있다. 유교적인 예문가(禮文家)로서 자부심을 지닌 많은 노인들은 역겨운 상복을 입고 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가슴속에 쌓인 울분과 수치심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같다. 조선인들은 광무태황제의 승하를 두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광무태황제의 통치가 어리석음과 실수로 점철된 오랜 통치였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라, 광무태황제의 승하가 .. 2023. 3. 27.
중국인에게 곤장 맞은 조선 장군들 박진 중국인 에게 맞아 죽다 https://iece12345.tistory.com/243 관유격 이라는 중국 장수가 조선장군 4명을 묶어다가 곤장을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 이당시 조선인들은 중국인들의 노리개 였다. 참고로 박진이라는 조선장군은 누승선 이라는 중국 장수에게 4년후에 맞아죽는다. ​ ※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8일 경오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박진 등에게 곤장을 친 관 유격의 일로 경략에게 게첩을 보내라 전교하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였다. "지금 듣건대 관 유격(毌遊擊)이란 자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朴晉)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까지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 박진 등이 비록 배신(陪臣)이기.. 2023. 3. 25.
박진 중국인 에게 맞아죽다 너무 끔찍한 내용이어서 , 선조수정 실록이나 기타 여러 선비들 문집에서는 기록이 없는데, 간신히 선조실록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그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취급이나 당하고 살았는지 알수있다. 선조 88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5월 29일(기미) 1번째기사 《주역》을 진강하고 김응남이 서계초를 올리고 군량·축성 문제 등을 의논하다 경립이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 2023. 3. 25.
조선인 으로서의 산업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 1923년(계해년) > 9월 27일 《목요일》 화창하고 따뜻함. 송도 집이다. 많은 조선인들은 이렇게 넋두리를 한다.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모두 일본인 수중에 들어가 있고, 조선인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고 말이다.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 분야에 관한 한 정말이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공업·상업 분야에서 조선인이 이윤을 남길 만한 활동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일본인을 빼고 조선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면, 중국인은 조선에서 농민으로서, 수공업자로서, 상인으로서, 날품팔이로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자본과 경험 부족으로 규모가 큰 사업을 경영할.. 2023.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