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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조선후기 안정복의 요동론

by afsefe 2023. 4. 5.

고조선 부터 시작하여 한반도의 요동에 대하여 쭉 서술하다가, 마지막에 요동을 수복 못하여 천하의 약소국이 되었다며 아쉬워 하고있다. 

 

동사강목 - 조선 후기 안정복 저서

동사강목 부록 하권 요동군고(遼東郡考)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제 환공(齊桓公)이 산융(山戎)을 치려 할 때에 관중(管仲)의 말에 따라 요수(遼水)를 건넜다.”

하였으니, 요(遼)라는 이름이 있은 지 오래다. 먼 옛날에는 동이(東夷)의 땅이었기 때문에 우(禹)의 발자취가 우갈석(右碣石)에 이르렀으며,

“도이(島夷)는 피복(皮服)을 바쳤다.”

하였는데, 도이는 우리 나라를 가리킨 것이다. 우리 나라는 3면이 바다이므로 그 형상이 섬[島]과 같기 때문이다. 《한서》에 또,

“조선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월(越)의 상(象)이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순(舜)의 덕교(德敎)가 퍼짐에 이르러 동이(東夷) 중에 귀화한 자가 더욱 많았다. 그러므로 기주(冀州) 동북의 땅으로 유주(幽州)를 삼았으니 지금의 요하(遼河) 이서가 바로 그곳이요, 청주(靑州) 동북 바다 건너의 땅을 영주(營州)로 삼았으니 지금의 요하 이동이 바로 그곳이다. 2주(州)를 설치한 것은 대개 이맥(夷貊)을 붙잡아 매려는 의도에서였다. 하상(夏商) 적에 구이(九夷)가 점점 성하여 중국에 들어가 사는 자가 있자, 이때부터 유주와 영주 땅은 다시 동이가 사는 곳이 되었다.

주(周)의 초기에 단군의 세대가 쇠하고 기자가 다시 그 땅에 봉해졌으니, 요서(遼西)인 지금의 의주(義州)ㆍ광녕(廣寧)으로부터 요동 전 지역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그 강역이었다. 중국의 지리지를 상고하면 알 수가 있다.

《주례(周禮)》 직방씨(職方氏)에,

“동북을 유주(幽州)라 하는데 그 산은 의무려(醫巫閭)요, 그 산물은 어염(魚鹽)이다.”

하였으니, 주(周)의 시대에는 지금의 요하 이서가 중국의 봉내(封內)에 있고 영주는 기자의 조선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기씨(箕氏)가 쇠하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조선의 서쪽 땅 천리를 탈취하여 만번한(滿潘汗) 지역으로 경계를 삼고 장성(長城)을 쌓았으며 조양(造陽) 상곡(上谷)에 있다. 으로부터 양평(襄平)에 이르기까지에 비로소 요동군(遼東郡)을 두었더니, 연(燕)이 망하자 진(秦)에 병합되었다. 〈진에서는〉 요수 동서를 나누어 2군을 만들고, 한(漢)의 초기에는 진(秦) 때의 것을 따르다가 무제(武帝) 때에 동부교위(東部校尉)를 세워 동이(東夷)를 거느렸고 이어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었으며, 소제(昭帝) 때에 진번(眞番)을 없애고 현도(玄菟)를 요동 동북의 땅에 옮겼는데, 왕망(王莽) 때에 와서는 요서가 오환(烏桓)에게 점거되어 요동의 경지가 날로 줄어들었다.

동한(東漢) 때에 다시 속국도위(屬國都尉)를 두고, 헌제(獻帝) 때에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의 서쪽땅을 점유하고 스스로 요동후(遼東侯)와 평주목(平州牧)이 되니, 동방 제국(東方諸國)이 많이 붙었는데 3세(世) 50년 만에 망하였다.

위(魏)에 와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두고 양평(襄平)에 있게 하고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합쳐서 유주(幽州)를 만들었는데, 진씨(晋氏) 곧 진(晋) 나라이다. 도 그대로 따랐다. 얼마 뒤에 모용씨(慕容氏)에게 점거되었고, 자주 고구려와 싸워 서로 침탈하였다. 모용씨가 쇠하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모용보(慕容寶)는 일찍이 고구려왕 담덕(談德)을 봉하여 요동공(遼東公)으로 삼았으며, 후위(後魏)에 와서 받은 봉작(封爵)에는 모두 요동이란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당 태종(唐太宗)이 동쪽을 정벌하여 요동성(遼東城)을 탈취하고,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더니, 뒤에 이갈(夷鞨)이 교대로 침범하므로 그를 없앴다. 현종(玄宗) 초년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그 땅을 차지하였는데, 당시 신라가 미약하여 고구려의 옛 강토를 복구하지 못하고 말갈과 발해에 붙도록 내버려 두었다.

발해가 왕 노릇한 지 2백 35년 만에 망하니 거란(契丹)에 흡수되었다.

거란이 옛 요동성을 수축하고 거주하면서 동평(東平)이라고 부르더니, 얼마 뒤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키고 또 동경(東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요계(遼界)를 찾으려고 요(遼)의 사신을 귀양보내 절교하면서 발해를 잔멸(殘滅)하였다고 이유를 들었으니, 대개 군사를 내는 데 명분을 세워 군사가 활발하게 하려고 했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갑자기 붕어(崩御)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와서 고구려의 옛땅을 요구하자, 서희(徐熙)가,

“거란의 동경(東京)은 본시 모두가 우리의 땅인데, 어찌 잠식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소손녕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금(金)은 동북여진(東北女眞)에서 일어나 요(遼)를 멸하고 그 땅을 차지하여 요의 동경을 그대로 따랐으며, 원(元)의 초기에는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으로 고쳐 제로(諸路)를 통솔하였고, 명(明)은 요동도사(遼東都司)를 두었으며, 청(淸)은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으로 삼고, 봉천부(奉天府) 건주(建州)를 두어 흥경(興京)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요동 득실의 시말이다.

명(明)이 일어났을 때 우리 태조가 동녕부(東寧府)를 쳐서 빼앗아 이때 이미 군사의 위력이 떨쳤으니, 그 형세로 보아 마땅히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거두어 옛 강토를 복구하였어야 할 터인데, 국내에 사고가 많아 밖을 경략할 겨를이 없었다.

북원요양행성 평장(北元遼陽行省平章) 유익(劉益)이 요양은 본디 조선 땅이라 하여, 사신을 보내와 분부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회답이 없자, 유익은 결국 명(明)에 귀부(歸付)하였다. 아, 요동을 복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압록강(鴨綠江)이 하나의 큰 철한(鐵限)이 되어 끝내 천하의 약국(弱國)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주D-001]월(越) : 여기서는 무(戊)자와 통하니 별 이름이다.

[주D-002]왕 노릇한 지 2백 35년 만에 망하니 :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세운 해가 699년이고, 14대 애왕(哀王) 26년(926)에 망하였으니, 모두 228년 간인데 235년 간이라고 한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주D-003]요(遼)의 …… 들었으니 : “거란이 사신을 보내와 낙타 50필을 선사하매 왕은 ‘거란이 일찍이 발해(渤海)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별안간 의심을 내어 맹약(盟約)을 어기고 멸망시켰으니 매우 무도(無道)하므로 화친을 맺어 이웃을 삼을 수가 없다.’ 하여 드디어 교빙(交聘)을 거절하며 그 사자(使者) 30명을 해도(海島)에 유배하고 낙타를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어놓아 다 굶어 죽게 했다.” 하였다. 《高麗史 世家卷2 太祖 25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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