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총병 4만 VS 청기병 300명
연려실기술 제26권 - 이긍익[李肯翊]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 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지탱하지 못하면 가운데가 홀로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완이 듣고 말하기를, “1등 포수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1월 3일 이른 아침에 적의 선봉 33명이 목방패(木防牌)를 가지고 남산 상봉(上峯)에서 줄지어 전진해 오니, 아군이 나가 맞이하여 한 번 싸워 용감하고 건장한 적병이 탄환에 맞아 죽고 탔던 말이 뛰어서 진중에 들어가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핍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포수가 연달아 함부로 쏘아대는 바람에 화약이 이미 다 떨어졌으므로 포수들은 화약을 더 달라고 연달아 소리치고 또 정포수를 더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적이 이 말을 알아듣고 다시 재촉하여 앞으로 나와 목책(木柵) 가까이 왔다.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약해(宣若海)가 홀로 적의 칼날을 당하여 손수 화살 30여 발을 쏘았으나 모두 목방패에 맞았고 화살은 이미 다 되니 신지(信地)에 우뚝 서서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적병이 목책 안으로 쳐들어오니 중견포수는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저절로 무너졌다. 허완이 겁을 집어먹어 말을 타지 못하자 3번이나 부축하여 말에 태웠으나 번번이 떨어져서 밟혀 죽었다. 군졸이 붕궤(崩潰)되어 쓰러진 시체가 목책과 가지런히 쌓여 있으니 적병이 짧은 무기로 함부로 찍었다. 또 우진에 다가오므로 민영이 진을 정돈하고 기다리다가 포환을 일제히 발사하니 맞은 자가 바로 죽었다. 적이 감히 핍박하지 못하므로 승전할 기세가 있었으나, 화약을 또한 단지 2냥씩만 주었기 때문에 다시 화약을 나누어주느라 급히 서두르다가 화승(火繩)이 화약에 떨어져서 화약이 폭발하는 바람에, 감분수령(監分守令) 2원과 군병이 타죽고 진중이 크게 동요되었다. 적이 이때를 틈타서 총돌격하니 마침내 전군이 전멸되고 민영도 죽었다. 적이 양진을 깨뜨리고 나자 죽은 자의 옷을 벗기고 또 불을 놓아 태우고 갔다. 처음에 선약해가 남산 위에 진을 옮기자고 세 번 청하였으나 민완이 끝내 듣지 않아서 마침내 적 3백여 기병에게 좌우 양진이 격파되었다고 한다.
국조보감 제48권 숙종조 8 / 14년(무진, 1688)
○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쌍령을 지나면서 말을 머물렸다. 상이 묻기를,
“이곳이 병자년에 군사들이 전몰한 곳인가?”
하니, 김수홍이 답하기를,
“경상 병사 민영(閔栐)과 허완(許完)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적의 습격을 받았으며 1명도 살아남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사람의 계략이 훌륭하지 못하여 결국 패망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그 충절은 높이 살 만합니다.”
하자, 상이 자손들을 관직에 기용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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