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록 내용은 1627년 정묘호란 당시다. 신하들이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싸우시오 말했으나 거절당하는 내용이다. 다른나라 왕이었다면 쫒겨났을것, 글이 길다면 마지막 문단만 보면 된다.
※인조실록 15권, 인조 5년 1월 23일 신묘 1번째기사 1627년 명 천계(天啓) 7년
대사헌 박동선 등이 도성을 떠나지 말 것과 친히 근왕병을 이끌고 나갈 것을 청하다
대사헌 박동선(朴東善), 대사간 이목(李楘), 집의 엄성(嚴惺), 사간 윤황(尹煌), 장령 강대진(姜大進), 한필원(韓必遠), 지평 유성증(兪省曾)·박안제(朴安悌), 헌납 김세렴(金世濂), 정언 신달도(申達道)·이경증(李景曾) 등이 아뢰기를,
"신 등이 어제 평안 감사 윤훤의 군관을 만나서 들으니 ‘윤훤은 오히려 사수할 계획이 있는데 서윤(庶尹)의 가속(家屬)들이 성 밖으로 나가 피하였으므로 그 모시는 아전을 처벌한 다음 도로 성중으로 들어오게 하니 이로 인해서 인심이 크게 안정되고 온 경내가 안도하였다. 그런데 기전(畿甸)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민이 놀라 혼란하고 파발마가 도망하여 흩어진 것을 보고도 장계를 전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신 등은 이 말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저 평양성은 병력이 1만 명도 채 안 되고 대적이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주장이 동요하지 않자 백성들이 감히 흩어져 도망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마음을 굳게 정하시어 도성을 떠나야 한다는 사설(邪說)에 현혹되지 않으셨다면 도성에 사는 백성들의 토붕 와해(土崩瓦解)됨이 어찌 이와 같음에 이르렀겠습니까.
전하께서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로는 김류·이귀·이서·신경진·심기원·김자점 등만한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혹은 해도(海島)로 들어가고, 혹은 산성(山城)으로 올라갔으며, 혹은 호위한다고 칭하고, 혹은 검찰에 제수되는 등 다 편안하고 안전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장만 한 사람만을 맨 손으로 적진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니 장만의 입장에서 보면 원망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정을 하직한 지 7일 만에 비로소 개성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역력히 보인 것입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에는 장만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도주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혁연히 분발하시어 국문(國門)에 나아가 직접 정벌에 나서겠다는 뜻으로써 군민(軍民)을 효유하시고, 맨 먼저 도성을 떠나자고 제창한 자를 조속히 목베어 군문에 효시하신 뒤, 먼저 이서·신경진 등을 파견하여 기병(畿兵)과 호위하는 제군을 나누어 인솔하여 변성을 지원하거나 임진강을 수비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는 근왕병들을 불러모아 친히 이끌고 이어서 나가신다면 삼군의 사졸들은 싸우지 않고도 사기가 배나 치솟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논한 바가 태반은 현실성이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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