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68 황산대첩 악장 궁수분곡 궁수분(窮獸奔)은 궁한 짐승 달아나다 라는 뜻이다. 이글은 황산대첩을 음악으로 표현 했다. 정도전 삼봉집 삼봉집 제2권 / 악장(樂章) 궁한 짐승이 달아나다[窮獸奔] 경신년(1380) 가을에 우리 태조는 왜적(倭賊)을 지리산(智異山)에서 만나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왜적은 이로부터 감히 육지에 올라 소란을 부리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음. 궁지에 빠진 짐승 험한 속으로 달아나니 / 有窮者獸奔于嶮墟 우리 군사 덮치자 좌우로 무너졌네 / 我師覆之左右離披 죽이고 사로잡고 달아나고 숨고 하여 / 或殱或獲或走或匿 죽은 놈은 가루 되고 산 놈은 혼 날렸오 / 死者粉糜生者褫魄 하루 아침 다 못 가서 활짝 열려 청명하이 / 不崇一朝廓以淸明 개가 부르고 돌아오니 동쪽 백성 편안하도다 / 奏凱以還東民以寧 2023. 4. 13. 위화도 회군 악장 위화도 회군에 대한 찬양 음악 ※삼봉집 -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 제2권 악장(樂章) 정동방곡(靖東方曲) 무진년(1388) 봄에 우(禑)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자 우리 태조는 우군장(右軍將)으로 여러 장수를 효유하여 의(義)로써 회군(回軍)하였음. 우리 동방은 동떨어진 바다 나라 / 繄東方阻海陲 저 교동이 천기를 도둑질하다니 / 彼狡童竊天機 - [※교동은 우왕을 뜻함]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미친 꾀를 부리어 큰 군사를 일으키니 / 肆狂謀興戎師 극에 달한 이 화를 막을 이 누구신고 / 禍之極靖者誰 동왕 되시어 덕이 거룩하시리이다 / 爲東王德盛多里利 하늘은 덕을 숭상, 의기를 돌리셨네 / 天尙德回義旗 죄 지은 놈 내쫓고 역적놈 멸족했네 / 罪其黜逆其夷 동왕 되시어.. 2023. 4. 11. 백운거사 이규보의 몽비부 동국이상국전집 제1권 / 고부(古賦) 6수(首) 몽비부(夢悲賦) 저 예쁘게 생긴 왕손(王孫 귀공자(貴公子)의 칭호)은 훌륭한 집안에 태어났지. 뛰어난 풍류(風流)도 사랑스럽고 윤택한 얼굴도 옥과 같은데, 나갈 땐 높은 수레, 들어올 땐 화려한 집, 여의주(如意珠)를 들어 산호(珊瑚)를 부수고도 마음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네. 뒷방에 고운 여자 비취잠(翡翠簪) 꽂고 가죽 신 끌면서 나와 찬란한 차림으로 번갈아가면서 모실 때 쨍그랑 울리는 패옥(佩玉) 서로 부딪친다. 눈에 드는 아리따운 태도와 귀에 익은 거문고와 피리 소리에 겨울철 찬 바람에도 추운 줄 모르고 여름철 찌는 듯한 날씨에도 더운 줄 모르니 이 세상 인생살이에 온갖 곤궁과 걱정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어찌 알랴? 봄 날씨가 이미 따뜻해지면 꽃다운 .. 2023. 4. 8. 명성이 높았던 공민왕의 글씨 공민왕은 뛰어난 화가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권근의 시문집 양촌선생문집 제23권 / 찬류(讚類) 이씨(李氏) 이름의 어찰(御札)에 대한 찬 병서(幷序) 내가 서원(西原) 이공(李公)과 함께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을 때, 공은 임금을 호위하는 임무에 있었고 나는 문학의 일을 보았다. 문무(文武)의 길은 달랐으나 아침저녁으로 서로 좌우에 함께 있었으므로 정의가 형제와 같았는데, 하물며 나는 한씨(韓氏)의 인척임에랴. 그 정의가 더욱 두터웠다. 당시 그의 아버지 의곡 선생(義谷先生)이 아직 건강하였는데, 임금은 그가 늙은 학자이며 오랜 덕망이 있다 하여 특별히 예모(禮貌)를 더해 대우하고 친히 ‘의곡청경(義谷淸卿)’이라는 큰 글씨 넉 자를 써서 내렸으며, 목은 상국(牧隱相國)이 이에 대해 찬을 지었다... 2023. 4. 7. 충혜왕의 소은병과 은화 유통 고려시대 은병화는 고액화폐로서 잘 이용되었다. 충혜왕 때는 소은병을 주조해서 휴대성이 간편화 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은화가 전혀 이용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명나라에 막대한 금은 조공 때문이었다. 조선 이방원 8년에는 명나라에 막대한 금은 조공 때문에 은화유통을 금지 시켰고, 나중에 세종 1429년에는 조선팔도에는 금은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명나라에 거짓말을 해서 금광과 은광을 폐쇄한다. ※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忠惠王) 신미 원년(1331), 원 지순 2년 ○ 새로운 소은병(小銀甁)을 사용하게 하였는데, 한 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匹)에 해당하게 하였으며, 옛날에 만들어진 은병은 통용을 금하였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1권 / 정교전고(政敎典故) 전화(錢貨)와 면포(綿布)저폐(楮幣).. 2023. 4. 4. 고려시대 충혜왕의 상업 충혜왕의 공장 https://iece12345.tistory.com/253 충혜왕은 시전에 점포를 차리고 상업을 적극 장려했던 왕임과 동시에 최고의 거상이었다. 조선시대 왕중에 충혜왕 만한 인물이 나왔다면 그렇게 미개하게 망하진 않았을거다. 충혜왕은 이미 한국 사학계에서 뛰어난 왕으로 재평가 받았는데, 일부 자극적인 내용 때문에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색마로 저평가 받고 있다. 역사라는건 그당시 사관이 어떻게 적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고려사 충혜왕 후3년(1342) 임오년 무오일. 왕이 의성창(義成倉)·덕천창(德泉倉)·보흥고(寶興庫)의 베 48,000필을 내어 저자에 점포를 열게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혜왕 후3년(1342) 임오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 2023. 4. 3. 고려시대 충혜왕의 공장 한반도 중세시대에 100명 넘게 일했던 공장이 있었으니, 고려말 충혜왕의 신궁이다. 비단 제직 공장을 만들어서 여공 126명 일하게 했던게 중근세 시대 한반도에 있었던 유일한 공장이었다. 그외에는 조선에서 상공업을 억누르다 보니 가내수공업에서 발전을 못했다. 반면에 근세시대 일본에서는 수많은 공장이 만들어 졌다. 충혜왕의 신궁은 고려사 글로 보건데 비단 제직 공장이자, 정미공장으로 보여진다. 마지막에 궁인 126명을 추방했다고 하니 공장 여공은 126명일것이다. 충혜왕의 후비는 총 네명이다. 임씨는 마지막 네번째 ※ 고려사 충혜왕(忠惠王) 후비 4.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 은천옹주(銀川翁主)임씨(林氏)는 상인 임신(林信)의 딸로 단양대군(丹陽大君)의 여종이었다. 사기그릇을 팔아 생계를 삼다가 왕.. 2023. 4. 2. 승려 파스파의 대우 고려시대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수입한건 잘알려져 있다. 밑에 자료의 내용은 원나라 황제 인종이 천하에 승려 파스파 사당을 세운다고 하고있다. ※ 치평요람 (治平要覽) 조선 세종 27년(1445)에 왕명에 따라 집현전 학사들이 만든 책. 치평요람 제144권 / 원(元) [인종〔仁宗〕] 고려(高麗) 심왕(瀋王)이 원(元)나라에 갔다. 고려 임금 왕도(王燾)가 금교역(金郊驛)으로 나가 전별하면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니, 심왕이 눈물을 흘리며 국사(國事)를 임금과 재추(宰樞)들에게 부탁하였다. 원 인종(元仁宗)이 명하여 심왕으로 하여금 연경(燕京)에 머물러 있도록 하니, 심왕이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놓고, 대유(大儒) 염복(閻復)ㆍ요수(姚燧)ㆍ조맹부(趙孟頫)ㆍ우집(虞集) 등을 초청하여 교유(交遊).. 2023. 3. 9. 고려시대의 누각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고려시대인 1343년에 지어진 누각이었으나 , 6.25때 폭파되어 사라졌고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겪고도 살아남은 건물인데 아쉬운 일이다. 누관의 장대함 이나 수려함이 중국에도 비교할 만한것이 드물정도였다. 특징이라면 여러 건물이 이어져서 2백여칸이나 된다. 사진은 일제시대 촬영사진 ※ 임하필기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성천부(成川府)의 객관 서쪽 비류강(沸流江)의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편액은 명나라 한림학사 미만종(米萬鍾)의 글씨이다. 모두 2백여 칸이 되는데 누관(樓觀)의 장대함이나 강산(江山)의 수려함은 중국에도 비교할 만한 것이 드물다. 숙종 정유년(1717, 숙종43) 이후에 중건하고 영종(英宗) 때에 또다시 중건하였다. 2023. 1. 20. 이색이 쓴 정세운 찬가(讚歌) 홍건적 10만명을 전멸시킨 정세운 장군 https://iece12345.tistory.com/100 이색이 말하길 "정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지만 정작 현대 한국인들은 정세운이 누군지도 모르는구나, 후손들로 써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정세운 장군의 초상을 그려서 모셨다는데 지금 북한에 있을라나 모르겠다. 그당시 정세운은 고려 최고의 무장 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강감찬을 포장 시켜놓은 이유는 문신 이라서 그랬던 거다. 동문선 제51권 / 찬(贊)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이색(李穡)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 이공(李公)이 임인(壬寅)년에 여러 장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했는데, 그 총병관(總兵官)은 곧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 2023. 1. 6. 고려시대 풍속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 선화봉사 고려도경 제22권 잡속(雜俗) 1 왕제(王制)에 넓은 들과 큰 내[大川]로도 제도(制度)를 달리하고, 백성이 그 사이에 생활하여 풍속을 달리한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넓은 들과 큰 내는 애초부터 반드시 먼 지방이나 절원한 지역이 아닐 것이다. 특히 중국의 땅이라도, 내[川]의 풍속이 혹 다르면, 습속이 각기 달라서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만이(蠻夷)의 한계가 바다 밖에 있으니, 그 풍속이 한 가지일 수 있겠는가?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文物)과 예의(禮義)를 갖춘 나라라 일컫고 있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 2023. 1. 4. 공민왕의 관음전 관음전[觀音殿] 고려 공민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건물이름. 공주의 혼전(魂殿) 곁에 아홉 개의 기둥을 써서 3층짜리 건물로 올렸음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전 [觀音殿] 여름 4월 ○ 영전(影殿)에다가 관음전(觀音殿)을 지었는데 모두 아홉 개나 되는 기둥에 그 규모가 매우 웅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19년(1370) 경술년 ) • 6월 계해일. 관음전(觀音殿) 제 3층의 들보를 올리다가 26명이 압사하자 이 소식을 들은 태후가 공사를 중지하라고 요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19년(1370) 경술년 2023. 1. 2. 이전 1 2 3 4 5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