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9 홍타이지의 조공품목 정묘호란 이후 인조는 명나라와 청나라 에 조공바치며 중립외교를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태종 홍타이지는 무리한 조공과 요구를 하며 조선을 압박한다. 애초에 중립외교 따위론 병자호란을 막을수 없다. 홍타이지는 막대한 조공 이유로 광해군 당시의 사르후 전투를 이유로 들고있다. 이 막대한 조공품목은 광해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사르후 전투때는 명나라를 도왔으니 이번에는 자신들을 도우라고 말한다. 또한 가도를 정벌하게 배도 달라고 하고있다. 맨밑에 조공품목이 쓰여있는데 상상을 초월한다. 100% 병자호란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병자호란 일어난 것도 광해군 때문인거다. ※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1월 25일 정사 1번째기사 1633년 명 숭정(崇禎) 6년 심양으로 간 사신 신득연이 예물은 전하지 못하고 호서만.. 2024. 1. 7. 조선에 호의적이었던 누르하치 초기 사학계에서는 광해군을 암군으로 찍어놨다. 그러나 어느순간에 광해군 재평가 과정을 거친후 뛰어난 군주로 미화했다. 그이유는 광해군 이었으면 병자호란 막을수 있었다는것이다. 그것은 조선인들이 자력으로 병자호란을 막아낼수있을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기위해 광해군을 끌어들인것이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조선에 좋은 감정을 가주고있어서 그랬던것이다. 청태종 홍타이지였으면 사르후 전투의 죄를 묻고 쳐들어와서 광해군이 인조꼴 났을거다. 광해군이 뛰어난 외교가면 박근혜도 뛰어난 외교가 다. 애초에 박근혜 시절 광해군의 외교를 본받아야 된다고 뉴스기사에서 많이 났었다. 그러나 이씨조선 전기만 봐도 어디 본받을만한게 있단 말인가 , 광해군은 내치도 엉망인것이 균형적인 붕당정치를 못한것이 강제퇴위 이유가 되었다. 전쟁이후 왕.. 2024. 1. 7. 사르후 전투 삼하의 전투 , 부차전투 , 사르후 전투 - 명나라와 후금과의 싸움에서 조선이 파병나가 싸운 전투다. 한국 국사학계에서는 이걸 중립외교로 그럴듯 하게 포장하는데 실제로는 1만3천명의 조선군에서 8천명이 전사하고 5천명이 포로로 붙잡힌 대패한 전투다. 광해군이 적당히 살펴서 이기는 쪽에붙으라는 밀지를 줬다는 내용이 실록에 나오는데 그건 인조반정후 정당화를 위해 꾸며낸 이야기다. 실제로 전투내용을 봐도 개터지듯 싸우다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내용밖에 안나온다. ※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12일 을미 1번째기사 1619년 명 만력(萬曆) 47년 평안 감사가 중국군과 조선군이 심하에서 패배했다고 치계하다 평안 감사가 치계하기를, "중국 대군(大軍)과 우리 삼영(三營)의 군대가 4일 삼하.. 2023. 8. 8. 정세규의 험천의 전투 병자호란 3대 패전은 - 쌍령의 전투 , 북문의 전투 , 험천의 전투 정세규는 무신이 아니고 문신 이었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7일 정유 4번째기사 / 공청 감사 정세규가 험천에 진을 쳤으나 전군이 패몰하다 공청 감사(公淸監司) 정세규(鄭世規)가 병사를 거느리고 험천(險川)에 도착한 뒤 산의 형세를 이용해서 진을 쳤다가 적의 습격을 받아 전군이 패몰했는데, 세규는 간신히 빠져 나왔다. ※연려실기술 제26권 /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䂓)는 병사 이의배(李義培)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알고, 날랜 군사를 뽑아서 몸을 떨쳐 홀로 나가 곧장 헌릉(獻陵)에 이르려 하였으나, 적병에게 막혀 험천(險川)에서 진을 쳤다. 적이 높은 산봉.. 2023. 6. 12. 청나라 황제의 은혜 청나라 황제는 조선을 정복한후 조선왕조를 유지시켜 준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 하라고 말하고 있다. 중원을 정복한 후에는 불쌍한 조선인들을 위해 조공물을 줄여준다. 청나라 황제의 인덕은 바다 보다도 넓다. 그게 아니었으면 지금 한국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무진 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종사(宗社)를 온전하게 하고, 이미 잃었던 그대의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짐은 그대 나라가 되풀이해서 교활하게 속였.. 2023. 4. 26. 중국의 조선인 마을 고려보(高麗堡) 고려보(高麗堡)는 병자호란 당시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마을이다. 심전고 [心田稿] 조선 순조 때 박사호(朴思浩)가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쓴 사행일기(使行日記) ※ 심전고 제1권 연계기정(燕薊紀程) ○ 무자년(1828, 순조 28) 12월 21일 맑음. 사류하(沙流河) 40리를 가서 점심 먹고, 옥전현(玉田縣) 40리를 가서 잤다. 환향하(還鄕河)는 물이 자못 넓다. 풍윤, 옥전을 지나 운하(運河)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무릇, 강물은 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강물만은 유독 서쪽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환향하’라 일컫는다. 옛날, 송 휘종(宋徽宗)이 이 하수의 다리를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사방을 돌아보며, “이곳을 지나면 큰 사막이 점점 가까워지니 내 어찌 이 물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 2023. 1. 4. 병자호란 쌍령전투 조선 조총병 4만 VS 청기병 300명 연려실기술 제26권 - 이긍익[李肯翊]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여러 장수의 사적(事蹟) ○ 좌병사 허완(許完)은 나이가 늙어 겁에 질려서 사람을 대하면 눈물을 흘리니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우병사 민영(閔栐)과 군사 4만을 합하여 고개를 넘어가는데 척후병을 파견하지 아니하여 막연히 적의 사정을 알지 못하였다. 광주(廣州) 쌍령(雙嶺)에 이르러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진을 치고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쳤는데 정포수(精砲手)를 뽑아서 모두 가운데에 두어 굳게 스스로를 호위하고 중등과 하등 포수는 밖에 몰아놓고 다만 화약을 사람마다 각각 2냥씩 나눠주었다. 초관(哨官) 이택(李擇)이 정포 천총 이기영(李起榮)을 불러서 말하기를, “외면이.. 2022. 12. 20. 병자호란 강화도에 있던 조선인들 여기에 적혀있는건 극히 일부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부인과 자살할려고 했는데 부인만 죽이고 자신은 살아남아 나중까지 잘살았다고 들었다. ※ 한수재선생문집 제25권 / 정비(庭碑)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 정비 이때에 원임 의정부 우의정 선원(仙源) 김 선생 상용(金先生尙容)이 기필코 나라를 건지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기를 “종사와 원손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하고는, 일이 매우 급하게 되자, 남성(南城)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화약을 깔고 앉아 분신자살하였다. 그리고 전 공조 판서 이공 상길(李公尙吉)은 이때 성 밖 10리쯤 되는 곳에 우거하고 있다가 성 안으로 달려 들어와 묘사의 신주에 곡하고 순절하였다. 전 돈녕부 도정 심공 현(沈公誢)은 집안사람이 배를 준.. 2022. 12. 20. 병자호란 강화도 전투 강화도는 몽골도 못건드렸던 천연요새다. 고려 몽골전쟁 당시 고려 귀족과 고려왕은 강화도로 파천했다. 고려에 왔던 몽골 전병력을 동원해도 강화도만큼은 굳건했다. 그런후 조선반도에 다시금 위기가 닥쳤으니 여진족이 4만5천병력으로 침략한 병자호란이다. 당연히 강화도로 도망가야지, 조선왕족 및 일부 양반들이 강화도로 도망갔다. 그러나 철벽요새라고 믿었던 강화도는 어이없이 고작 청나라 군대 3천병력 한테 뚫려서 거기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가거나 죽었다. 원래 인조 또한 강화도로 피난 갈려고 했었다. 그런데 어찌된게 남한산성 보다 더 일찍 강화도가 점령 당했다. 그것도 고작 3천병력한테, 왜 이렇게 쉽게 그 천연요새라는 강화도가 무너졌을까, 그 최강이라는 몽골군도 손도 못댔을 정도였는데, 그이유는 방비를 전혀 안.. 2022. 12. 20.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