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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113

조선인 으로서의 산업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 1923년(계해년) > 9월 27일 《목요일》 화창하고 따뜻함. 송도 집이다. 많은 조선인들은 이렇게 넋두리를 한다.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모두 일본인 수중에 들어가 있고, 조선인이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다고 말이다.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 분야에 관한 한 정말이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농업·공업·상업 분야에서 조선인이 이윤을 남길 만한 활동 공간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일본인을 빼고 조선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면, 중국인은 조선에서 농민으로서, 수공업자로서, 상인으로서, 날품팔이로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자본과 경험 부족으로 규모가 큰 사업을 경영할.. 2023. 3. 15.
동양식 도덕률 이 윤치호 일기에는 여자가 기생집에서 몸을 팔며 자신의 오빠 학비를 벌었다는 내용이다. 한국 초기에도 이런식이었다. 집안에서 아들과 딸을 낳으면 딸은 일을 하며 그 집안의 남자를 부양해야 했다, 여성에게 인권은 없었다. 6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한국사료총서 번역서6)>1919년(기미년)>1월> 8일 《수요일》 쌀쌀하고 날이 풀렸음. 때때로 비. 백 부위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명희가 또 아파서 거의 쉬지 못했다. 가벼운 감기에다가 부주의가 겹쳐 피곤하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오후에 비가 조금 내렸다. 요전 날 태화관에서 아름다운 기생을 보았다. 그 기생이 변치덕(邊致德)의 여동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다. 변치덕은 예전에 주일학교 교사였고, 수표교 교회에서 적극적으로 .. 2023. 3. 13.
윤치호가 말하는 불편한 한복 일본은 지금도 일상에서 자신들의 전통복을 많이 입는편이다, 그에비해 한국인들은 일상에서 한복을 전혀 입지 않는다. 한복은 남성복식이건 여성복식이건 활동면에서 고려된것이 아니다. 그러니 경복궁 방문 깜짝 이벤트 아니면 안입는 것이다. 그것도 한복입으면 입장 할인 이라거나 그런식이다. ​ 3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한국사료총서 번역서3)>1895년(조선 개국 504년, 고종 32년, 을미년)>3월 2일(음력6일) 《토요일》 흐림. 소중한 아내와 처제로부터 편지 한 통씩을 받았다. 아내의 편지는 2월 20일자다. 내 자신을 조선인으로 개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두발 문제는 지난 3월 중국에서 경험했던 것만큼이나 괴롭다. 신발은 아주 뻣뻣하고 볼품없다. 조선인의 옷은 결코 편리한 활동을 위해 고려된.. 2023. 3. 11.
조선말 세계 인지도 조선의 국기는 1883년에 만들어 졌다. 그러나 세계는 조선이란 나라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자료를 통하여 그당시 조선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2집 국역윤치호영문일기2(한국사료총서 번역서2)>1893년(조선개국 502년, 고종 30년, 계사년)>9월 28일 시카고. 아침식사 후 박람회에 갔다. 건물마다 거의 모든 나라의 국기가 펄럭였는데 어떤 건물에도 조선의 국기가 없어 모욕감을 느끼었다. 아! 조선의 처지가 이처럼 낮고 조선의 부끄러움이 이처럼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나를 사로잡은 표현할 수 없는 웅장한 건축기술을 한껏 뽐내던 건물들이 한두 달이 지나면 평평한 땅으로 변할 것이다. 아, 덧없는 무상함이여! 이 건물들을 없애야 하는 이유는 건축 자재가 기후를 이겨.. 2023. 3. 7.
일본과 미국의 비교 윤치호는 200년을 내다보고 있는데 지금 100년차지만 가망이 없어보인다. 공부는 일본인보다 더 많이 하면서 못따라잡는거 보면 일본인 보다 열등해서 인가 ​ 10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10(한국사료총서 번역서10)>1939년(기묘년)>10월 14일《토요일》 쾌청. 도쿄. 우리 아들들의 하숙집에서 잘 쉬었다. 나는 어떤 조선인이 미국이나 유럽을 갔다 와서는 도쿄의 건물과 거리를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도쿄를 얕보는 듯이 말하는 걸 들으면 참을 수가 없다. 조선인이라면 마땅히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겸손해져야 한다. 도대체 조선이 미국이나 유럽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조선인들이 능력과 능률면에서 일본인들을 따라잡으려면 200여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2023. 3. 6.
윤치호 일기로 보는 조선시대 인구 1919년 윤치호 일기를 보면 이 당시 조선의 인구는 1600만 , 일본의 인구는 5000만, 조선 거주 일본인 인구는 33만 이다. 한국 사학계에서는 1910년 조선의 인구는 1700만 이라고 주장을 하고있으니 크게 오류가 난다. 솔직히 한국 사학계에서는 크게 과장 미화시켜서 주장하는 것 뿐이다. 1910년당시 누락치 까지 더한다고 해봐야 조선의 인구는 1400만 정도다. 6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한국사료총서 번역서6)>1919년(기미년)>9월 28일 《일요일》 화창한 날씨. 종교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모펫(Moffett) 박사가 강렬한 설교를 했다. “주님께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이 모펫 박사 설교의 요지다. 사촌동생 치소의 말에 따르면, 어떤 조선인들은 내가 .. 2023. 3. 5.
500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낸 조선 허구헌날 입으로만 농업이 최고라며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지껄였으면서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했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1923년(계해년)>8월>2일《목요일》흐리고 후텁지근함. 2일 《목요일》 흐리고 후텁지근함. 아침에 비가 왔다. 오전 8시 25분 기차로 서울을 출발해 송도로 갔다. 수색에서부터 상당한 거리에 걸쳐 논이 모두 물에 잠겼다. 참담한 광경이다. 가난한 농민들은 오랜 가뭄 때문에 속이 타들어갔고, 그 뒤에는 무자비한 홍수에 흠뻑 젖고 말았다! 조선왕조의 통치자들이 유교 경전을 암송하고 당파싸움을 벌이느라 보낸 시간을 좀 줄여서 도로, 다리, 적절한 제방과 저수지를 만드는 데 썼다면, 오늘 우리 형편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2023. 3. 1.
윤치호와 3 1운동 6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6(한국사료총서 번역서6)>1919년(기미년)>3월>1일 토요일 화창한 날씨. 1일 《토요일》 화창한 날씨. YMCA에 출근했다. 오전 10시쯤 육정수 군이 한 말에 따르면, 박희도(朴熙道) 군이 자기 책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고,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며, 박희도의 태도가 매우 수상했던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야마가타 데이사부로 씨와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 1시가 조금 지나 형사들이 YMCA회관에 와서 문건을 찾는다면서 사무실과 서랍을 샅샅이 뒤졌다. 1시 30분쯤 거리에서 군중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거리를 가득 메운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 2023. 2. 27.
윤치호의 조선 개혁안 윤치호는 유교에의해 황폐화된 조선이 생기를 회복할려면 수백년 걸릴지도 모른다. 라고 내다봤다. 아주 정확하다. 지금도 이나라는 유교의 병폐에 의해 몸살 앓고있으니 말이다. 유교의 보수성 , 사농공상에 의해 아직도 공업을 천대하고있는 사상, 위계질서 상명하복 권위주의, 유교적 제사문화 , 엽관(獵官)의 나태함 , 여성차별 , 허례허식 , 학업위주 문화, 유교야 말로 아나라의 적폐다. 아직 백년정도 밖에 안지났다. 유교의 병폐는 이나라에서 영원히 안사라질것이다. 윤치호의 마지막 문장은 조선의 건국을 부정하고있다. 조선은 성리학자들이 건국한 나라다. ​ 2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2(한국사료총서 번역서2)>1894년(조선 개국 503년, 고종 31년, 갑오년)>9월>28일(29일) 《금요일》 구름 끼고 쌀쌀한.. 2023. 2. 26.
창씨개명을 한 윤치호 윤치호는 이토지코 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현재 사학계에서는 윤치호를 친일파로 분류 했기때문에 넙죽 창씨개명을 했을거라 생각하겠지만 윤치호는 창씨개명을 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애초에 창씨개명이 사학계에서 주장하는것처럼 강제적이었다면 고민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 1). 창씨개명을 할지 회의를 열다. 10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10(한국사료총서 번역서10)>1940년(경진년)>1월 7일《일요일》 흐리고 쌀쌀함. 서울 집. 오후 3시 30분 사촌동생 치소와 치영, 그리고 내 동생 치왕과 치창과 함께 사촌동생 치오의 집에 모여 창씨개명에 관해 찬반논의를 했다. 치창, 치왕, 치오는 자녀들을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한다는 데 찬성했다. 반면에 치영은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치소는 아직 입장을 .. 2023. 2. 24.
조선반도의 지역감정 ※ 서북파와 기호파 https://iece12345.tistory.com/181 ※ 남북분단의 씨앗 https://iece12345.tistory.com/182 조선인들의 지역감정은 어디서 왔을까, 남북으로 분단되었을때 그들은 기뻐했을것이다. 철천지 원수들끼리 붙어있을바엔 서로 떨어져 있는게 나았을테니 말이다. 조선인들은 독립 준비가 안되어있었기 때문에 분열한 것이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1920년(경신년)>8월 30일 《월요일》 오전에 후덥지근하다가 오후에 비. 송도 집이다. 유성준 씨와 서광세(徐光世) 씨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점심을 들었다. 두 사람은 우리 집이 마음에 든 듯하다. 경기도 참여관인 유성준 씨가 말하기를, 독립운동이 시작된 뒤로 일본인들이 자신에게 .. 2023. 2. 23.
조선시대 성복동 일제시대 화원 https://iece12345.tistory.com/174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윤치호는 조선에 아름다움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 하고있다. 조선시대에 화원하나 없었던것만 봐도 알수있다. 조선반도는 산지가 일본만큼 많았던 나라 였다보니 조금만 꾸미면 아름다운 나라가 될수 있었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1920년(경신년)>3월 8일 《월요일》 어둑어둑하다가 오후에 맑음. 집에 있었다. 오후 5시에 성북동으로 산책 나가서 오후 7시에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 500년 동안 일본인이나 미국인의 관리를 받았다면, 성북동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 되었겠는가! 조선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개선하지 않은 채 방치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망가뜨려왔다. 마을 주민들의.. 2023. 2.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