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38 타다가 부서진 장영실의 수레 이 실록글을 볼때 장영실의 수레는 세종이 타다가 부서졌다는것을 알수 있다. 지난번 이라 쓰여있으니 과거형 을 말하는거다. 이 실록글이 발견되기 전까지 타기 전에 부서진거다 라는 주장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분명 세종시대 까지 먼길을 수레타고 다닐정도 였는데 세종시대 이후에는 수레가 없어진거는 이상한 일이다. ※ 세종 95권, 24년(1442 임술 / 명 정통(正統) 7년) 3월 16일(정축) 2번째기사 대호군 장영실이 만든 안여가 견실하지 못하여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다 ※ 세종 95권, 24년(1442 임술 / 명 정통(正統) 7년) 3월 19일(경진) 1번째기사 강원도의 굶주린 백성을 진휼할 방책과 여를 메고 갈 인부의 문제를 논의하다 평강 이북에서는 길이 험하고 산이 막혀 수레를 타지 못할 것이나, 그.. 2022. 12. 16. 명나라 신하 이상과 창성의 횡포 이상과 창성은 조선에서 명나라로 끌려간 고자들로 보인다.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8월 12일 병술 1번째기사 1429년 명 선덕(宣德) 4년 명나라 사신 이상과 창성의 염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정사를 보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좌우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명나라 사신 이상(李相)은 매우 어질지 못한 사람이다. 가는 곳마다 번번이 사람을 구타한다니, 본국(本國)의 사람으로서 감히 모질고 사나운 짓을 함부로 함이 어찌 이와 같은 자가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또 들으니 창성(昌盛)이 영접 도감(迎接都監)의 은발(銀鉢)을 훔쳐갔으며, 또 지나가는 주현(州縣)에서 의자(椅子)라든가 좌구(坐具) 같은 물건도 좋은 것을 보면 보는 대로 탈취(奪取)해 가고, 또 민간(民間)의 말.. 2022. 12. 14. 처녀를 탐하는 환관 세종시대 중국으로 끌려갔던 조선 처녀들, 뭐 다알겠지만 환관은 거제된 남자를 뜻한다. ※교자(轎子) - 수레 ※내관(內官) - 환관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0월 16일 갑오 2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宣德) 3년 처녀들의 행차에 대해 묻다 임금이 대언(代言) 등에게 이르기를, "처녀(處女)들이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하니, 좌대언 김자(金赭)가 대답하기를, "이미 안주(安州)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황엄(黃儼)이 처녀를 배종(陪從)하고 갈 때에는, 공경하고 두려워하기를 황후(皇后)나 비빈(妃嬪)을 대하는 것처럼 하였다는데, 이제 창성(昌盛)·윤봉(尹鳳)·이상(李相) 등은 몹시 태만하고 불경하니, 처녀가 중로에서 병을 만났도다. 창성(昌盛) 등은 말을 타고 .. 2022. 12. 14. 세종의 노비 종모법 세종의 노비 종모법은 한국사의 중대한 단초중 하나를 끊은 비극으로 이어진다. 내가 전에 쓴 태종의 노비 종부법을 읽었다면 분명히 양인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종은 양반들의 요청에 따라 노비법을 종모법으로 바꾸고 말았다. ※세종 55권, 14년(1432 임자 / 명 선덕(宣德) 7년) 3월 15일(갑술) 3번째기사 상정소의 제조 맹사성·권진·허조·정초 등을 불러 의논하기를, “내가 즉위(卽位)한 이래로 조종께서 이미 이루어 놓은 법은 고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으며, 만약 부득이한 일이 있을 경우에만 여러번 고친 일이 있다. 그러나 노비에 대한 법은 아직 고친 일이 없다. 다만 공·사비(公私婢)로서 양민(良民)에게 시집가서 낳은 자녀(子女)는 양민으로 처리한다는 법은, 대신들이 그것의 옳지.. 2022. 12. 13. 태종의 노비 종부법 효과 태종이 노비 종부법을 시행한후, 지들 노비 숫자가 줄어들고 있으니 양반들이 얼마나 슬펐을까, 노비여자들이 주인에게 고하지 않고 양인남자에게 시집가는 자가 매우 많으니 그여자들은 전부 관노비로 만들라고 세종에게 말했더니 세종이 거절하는 내용이다. 태종이 노비 종부법을 시행하면서 노비 숫자가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세종이 다시 노비 종모법을 시행했다. ※세종실록 42권, 세종 10년 12월 9일 병술 7번째기사 1428년 명 선덕(善德) 3년 예조에서 양인에게 시집가는 천한 신분의 여자의 처리 문제에 대해 건의하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천한 신분의 여자로서 양인(良人)에게 시집가는 자는, 사천(私賤)은 그 주인에게 고하고, 공천(公賤)은 관(官)에 고한다는 것으로 이미 이루어진 법이 .. 2022. 12. 12. 수도까지 털었던 세종시대 도적들 세종시대는 소설 홍길동전 시대배경이 된만큼 도적들이 많았다. 단순히 없어보이는 이유는 고려말 처럼 일부러 악화시켜 보이게 안했기 때문이다. 도적들이 약탈하는거 하나하나 적어봐라 얼마나 많아 보이겠냐, 사관이 쓰기 나름이다. 그러니 고려사는 승리자의 역사서로 불리는거다. 세종시대 도적은 명화적(明火賊)으로 유명하다. 수도의 관서까지 털어먹었을 정도였는데 고려시대도 이정도까진 아니였던걸로 안다. ※ 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14일 무인 1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절도죄의 처벌과 천구의 관직 제수에 관한 사간원의 상소문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1. 서경에 이르기를, ‘무리를 지어 내외에서 구적(寇賊)을 자행하는 자는 무릇 백성으로서 원망하지 않는 자 없다. ’고 하였습니다. 대저 .. 2022. 12. 11. 훈민정음 미스터리 - 소리가 문자인가?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을 가리치는 정확한 소리라는 뜻이다. 그 당시 한자 음독화 프로젝트를 말하는 거다. 고려시대 당시는 일본처럼 한자를 훈독으로 읽었는데, 세종시대는 중국식 발음인 음독으로 읽기 위해 한글이 필요했던 거다. 그러다 보니 실록에 쓰여있는건 한자 음독화 프로젝트인데 한글 프로젝트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한다. 최만리 상소문에서 세종이 말한 운서라든가, 요동에 있는 음운학 권위자 라든가 그런게 전부 한자 음독화 내용들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동국정운 같은 운서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웃긴 게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이 직접 지은 한글 이름이다. 또 다른 언문이란 이름은 어디서 온건지 사학자들도 모른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문자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음(音)은 소리기 때문이다. 주시.. 2022. 12. 10. 훈민정음 미스터리 - 하루만에 만들어진 문자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놀라운 내용이 쓰여있다. 그건 바로 한글은 하루만에 만들어진 문자라는 것이다. 많은 사학자들이 왜 실록에 한글만든 내용이 없을까에 대해 여러 의문점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비밀 프로젝트다 그런식으로 온갖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해례본에 쓰여있는 내용을 보면 세종이 초능력을 발휘해서 하루아침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록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없을 수밖에 정말 대단하다. 그 어떤 천재가 세종에게 비길수 있겠는가, - 훈민정음 해례본 - 한문의 입성은 거성과 비슷하다. 방언과 속어가 모두 달라 소리는 있으나 글자가 없어 글로 통하기가 어렵더니 하루아침에 지으시어 하늘 솜씨에 비기니 대동국 천고에 어둠을 깨우치셨네 方言俚語萬不同 有聲無字書難通 一朝 制作侔神工 ※ 일조 제작모신공 大東.. 2022. 12. 10. 훈민정음 해례본 - 야사의 탄생 훈민정음 해례본은 해외에서건 국내에서건 전문가들한테 무시나 당하고, 실제 한글연구에 보탬이라곤 1도 안되는 책이다. 왜 이런일이 발생했을까, 총책임자인 세종이건 집현전 학자건 실제로 한글을 안만들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해례본은 성리학책 황극경세서 가주고 만든거다. 창제원리를 담으랬더니 성리학책 가주고 파쿠리나 해놓은거다. 한국인들도 해례본이 창제원리가 담겨있다는건 알아도 정작 읽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그당시 1책은 워낙에 짧기때문에 다읽는데 10분도 안걸린다. 그렇게 해례본이 자랑스러운 책이었으면 학생때 교사들이 낭독하며 가르쳤겠지, 정작 국민들이 못 읽어보게 숨기는 이유가 다 있는거다. 훈민정음 해례본 번역문 https://iece12345.tistory.com/10 훈민정음 - 뒷간문자 http.. 2022. 12. 9. 훈민정음 해례본 번역문 순전히 귀신 푸닥거리 하는 소리만 쓰여있다. 입모양 본떠서 만들었네도 쓰여있으나 이미 여러 전문가들에게 논파된지 오래다. 실제로 해보면 안만들어 지는 경우가 많다. 그후 글자 완성 예시가 쭉 쓰여있다. 난 속독으로 한번 읽고 정독으로 다시 한번 읽어 두번 읽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역시 세종이 신기(神機)를 발휘해서 하루만에 한글을 완성했다는거다. 이걸 바탕으로 드라마나 소설등 다시 만들어야 할거다. 한국 사학자들이 몰라서 숨긴건 아닐거다. 반작용을 우려한거겠지, 출처 https://ko.wikisource.org/wiki/%ED%9B%88%EB%AF%BC%EC%A0%95%EC%9D%8C 訓民正音[편집] 번역원문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 2022. 12. 9. 뒷간 문자 - 훈민정음 마지막에 세종이 뒷간에서 막대기 가주고 배열해보다 문득 깨닫고 성삼문 등에게 창제하게 시켰다는데 , 세속에 전하기를 이라고 쓰여있는걸로 봐서 조선 후기에 보통 저렇게 알려져 있었나 보다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의 저술 총서 청장관전서 제54권 / 앙엽기 1(盎葉記一) 훈민정음(訓民正音) 훈민정음에 초성(初聲)ㆍ종성(終聲)이 통용되는 8자는 다 고전(古篆)의 형상이다. ㄱ 고문(古文)의 급(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ㆍㄴ 익(匿)자에서 나온 것인데, 은(隱)과 같이 읽는다. ㆍㄷ 물건을 담는 그릇 모양인데, 방(方)자와 같이 읽는다. ㆍㄹ 전서(篆書)의 기(己)자이다. ㆍㅁ 옛날의 위(圍)자이다. ㆍㅂ 전서의 구(口)자이다. ㆍㅅ 전서.. 2022. 12. 9. 훈민정음 미스터리 - 가짜실록 교차검증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30일 경술 2번째기사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어제(御製)에, 중성(中聲)과 같고, 종성(終聲)은 다시 초성(初聲)으로 사용하며 [.. 2022. 12. 9.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