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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32

조선의 경복궁 이름 고려시대 경복궁 https://iece12345.tistory.com/268 최근에 서울에서 고려시대 궁궐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시대는 수도가 세개나 있었기 때문에 현재 안알려진 고려시대 궁궐들이 많다. 조선의 경복궁 이름또한 원래는 고려시대 궁궐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거다. 그러나 새 나라를 건국 하고서 대표 궁궐 이름을 짓는다면서 그전에 있던 궁궐 이름을 그대로 갖다쓴건 웃긴일이다. 그것도 지들이 그렇게 부정했던 고려시대를 말이다. 근데 이글의 셋째줄을 보면 그전에 있던 궁궐 이름을 고쳐부르거나 그대로 갖다 쓰는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고 쓰여있다. 이말을 볼때 경복궁 이란 이름을 일부러 그대로 갖다 쓴걸로 보인다. 고쳐 부른 사례를 보면 광해군때 지은 경희궁도 고려 궁궐 이름에서 한자만 고쳐쓴거다. 그.. 2023. 6. 7.
조선후기 평민들의 가난 18세기 말에 포천에서 현령을 지낸 실학자 박제가[朴齊家](1750~1850)는 당시 농민의 극심한 가난과 그 원인을 이렇게 전한다. ​ 그들은 화전을 일구고 나무를 하느라 열 손가락 모두 뭉툭하게 못이 박혀있었지만, 입고있는 옷이라고 해야 십년묵은 헤진 솜옷에 불과했고, 집이라고 해봐야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는 움막에 지나지 않았다. 먹는 것이라고는 깨진 주발에 담긴 밥과 간도 하지않은 나물뿐이었고, 부엌에는 나무젖가락만 달랑 놓여있고, 아궁이에는 질항아리 하나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이유는 간단했다. 무쇠솥과 놋수저는 이정(里正)이 이미 몇차례나 빼앗아 갔고, 군포(軍布)대신에 동전 2.5~2.6냥씩을 해마다 납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 박제가 [북학의] ​ 두얼굴의 조선사 - 글항아리 2023. 5. 31.
고려시대 신사(神祠) 남치근이 없애버린 신사들 https://iece12345.tistory.com/235 한국도 일본처럼 신토가 많이 발달했던 나라였으나, 조선시대 유생들이 다 불태워 버려서 전부 사라졌다. 대대적으로 없애버린 시점으로 보면 명종시대 다. 한국은 역사만 길뿐 유적같은 건 하나도 없는 나라다. 그말은 즉 조상들이 남겨놓은게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고려도경 사우(祠宇) 동신사(東神祠)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편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칸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2023. 5. 25.
고려시대 왕진(王縉) 왕진(王縉)이 누구인지 사학계 주석이 없는 걸로 보아 사학계쪽에서도 모르는 듯 하다. 왕씨 족보를 찾아봐야 된다. 인터넷에 왕진(王縉)이라고 검색하면 중국 당나라 사람 이름이 나오지만 당나라 왕진은 왕족이 아닌 관계로 이규보가 쓴 시의 인물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고려 왕족 왕진 이란 사람의 궁중을 그린 시로 보인다. 고려시대 귀족 저택의 특징은 바닥에 담요를 깔았고, 개인 누각이 있었고, 정원과 연못이 있었다. 이 특징들은 이시를 읽어보면 다 나온다. ★종실 - 왕족 ★사공 - 정 1품 관직 ★척리戚里 - 임금의 친척 ★은전 - 나라에서 내리는 혜택 ※동국이상국전집 제2권 / 고율시(古律詩) 종실(宗室) 사공(司空) 왕진(王縉)의 궁중에서 지어 올리다 척리에 공이 유독 빈객을 사랑하시어 / 戚里唯公愛.. 2023. 5. 15.
개경 송악산의 자하동 고려시대 자하동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자하동에서 고려 귀족들은 신선 처럼 살았다. 채홍철이 살던 중화당 이란 집은 과연 지금도 있을까 ★자하동 [紫霞洞 ] 개경(開京)의 송악산(松嶽山)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이름났던 곳이다. ★중화당 :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자하동에 지었던 집 이름이다. ★기영회 : 70세가 넘어 벼슬에서 물러난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한 모임 ★수장 : 장수(長壽)를 비는 술이다. ★희황 : 중국의 신화적 임금인 삼황(三皇)의 하나 ★자하 : 자줏빛 구름과 놀로 도가(道家)에서는 신선이 이것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국역 고려사 : 지 자하동 [紫霞洞 ] 집이 송악산의 자하동에 있는데 중화당(中和堂)은 구름과 안개.. 2023. 5. 2.
고려시대 경복궁 고려시대에도 한자까지 똑같은 경복궁(景福宮)이 있었다. 국역 고려사 : 세가 명종 5년(1175) 을미년 • 11월 무오일. 왕이 거처를 경복궁(景福宮)으로 옮겼다. 병인일. 다시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 12월 계미일.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종 5년(1175) 을미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고려시대 궁궐 수창궁(壽昌宮) - 도성 서소문 안에 있던 궁궐 [다른이름 수녕궁] 연경궁(延慶宮) - 개성 송악산 아래에 있던 궁궐 경희궁(景禧宮) - 조선의 경희궁(慶喜宮)과는 틀리다. 2023. 4. 14.
고려시대의 누각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고려시대인 1343년에 지어진 누각이었으나 , 6.25때 폭파되어 사라졌고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임진왜란 겪고도 살아남은 건물인데 아쉬운 일이다. 누관의 장대함 이나 수려함이 중국에도 비교할 만한것이 드물정도였다. 특징이라면 여러 건물이 이어져서 2백여칸이나 된다. 사진은 일제시대 촬영사진 ​ ※ 임하필기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성천부(成川府)의 객관 서쪽 비류강(沸流江)의 서쪽 기슭에 있는데 그 편액은 명나라 한림학사 미만종(米萬鍾)의 글씨이다. 모두 2백여 칸이 되는데 누관(樓觀)의 장대함이나 강산(江山)의 수려함은 중국에도 비교할 만한 것이 드물다. 숙종 정유년(1717, 숙종43) 이후에 중건하고 영종(英宗) 때에 또다시 중건하였다. 2023. 1. 20.
원각사의 최후 원각사는 고려시대 사찰인데 원래 이름은 흥복사 였다. 이성계때 조계종 본사가 되었으나 곧이어 세종때 폐사되어 관청으로 삼았다가 세조 10년에 다시 고쳐짓고 원각사라 칭하고 부흥하는듯 하나 연산군때 폐사되어 절을 허물어 버렸다. 현재는 원각사비 가 남아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 ※용재총화 제7권 원각사(圓覺寺)는 본시 큰 절인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서의 선당(禪堂)이 있을 뿐이었다. 관습도감(慣習都監 세종대왕 .. 2023. 1. 7.
공민왕의 관음전 관음전[觀音殿] 고려 공민왕이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건물이름. 공주의 혼전(魂殿) 곁에 아홉 개의 기둥을 써서 3층짜리 건물로 올렸음 [네이버 지식백과] 관음전 [觀音殿] ​ 여름 4월 ○ 영전(影殿)에다가 관음전(觀音殿)을 지었는데 모두 아홉 개나 되는 기둥에 그 규모가 매우 웅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19년(1370) 경술년 ) ​ • 6월 계해일. 관음전(觀音殿) 제 3층의 들보를 올리다가 26명이 압사하자 이 소식을 들은 태후가 공사를 중지하라고 요청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19년(1370) 경술년 2023. 1. 2.
고려시대 신돈의 집 고려시대 신돈의 집은 조선중기 선조때 까지 남아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고려시대 건물이 많이 남아있었다는걸 알수있다. 물론 임진왜란 이후 다 사라졌겠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인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야담 수필집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차천로(車天輅) 찬 신돈(辛旽)의 집은 아직도 층루(層樓) 한 구역이 남아 있어, 그 전에는 혜민국(惠民局)[병원]이 되었더니, 심락(審樂)이 여기에서 살았다. 이창(李敞)이 도사(都事)가 되었을 때, 그 위층을 헐어 합쳐서 한 채로 만들었는데, 지금은 상평창(常平倉)[국가 창고]이 되었다. 나의 아버지 집도 그 앞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내가 어릴 적에 그 누에 올라간 일이 있었다. 곳곳에 우묵하게 구부러진 방을 만들어 대낮에도 깜깜하였다. 이는 신.. 2023. 1. 2.
고려시대 누각 ※최우가 지은 대형 누각 https://iece12345.tistory.com/76 고려시대에는 누각이 많았다. 글을 보면 고려시대 부터 중국을 보고 배워와서 점차 지은걸로 보인다. 조선시대를 보면 아무리 양반이라해도 개인이 소유한 누각은 없는데 고려시대에는 고려도경 - 성읍(城邑) 누관(樓觀)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을 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건축하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나라에서 개설한 도로) 양쪽과 국상(國相 일국의 재상),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가호마다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 2023. 1. 2.
원각사와 봉선사 원각사 청기와 원각사 는 세조가 창건했지만 연산군 때 폐사되어 절을 허물어 버렸다. 1.) 세조실록 33권, 세조 10년 6월 12일 갑오 2번째기사 1464년 명 천순(天順) 8년 홍윤성을 불러 원각사 법당을 덮을 청기와에 대해서 논의하다 와요 제조(瓦窯提調)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을 불러 원각사(圓覺寺) 법당(法堂)에 덮을 청기와[靑瓦]를 의논하니, 모두 8만 장(張)이라 구워서 만드는 데 들어가는 경비가 매우 컸었다. ​ ​ 봉선사 청기와 예종1년에 세조의 비 윤씨가 창건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어 지금은 청기와가 없다. 2.) 성종실록 218권, 성종 19년 7월 17일 무인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윤민 등이 차자를 올려 유효손 등의 노비의 속공과 봉선사 보수에 관해 .. 2023. 1. 1.